면도날. 박형철 청와대 반부패비서관 별명이다. 검사 출신 박 비서관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수사한다는 평판으로 법조계는 물론, 정계에도 알려졌다. 그는 2012년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사건도 수사했다.
그런 면도날 검사가 울음을 삼켰다. 박 비서관은 19일 오후 브리핑을 자청, 청와대 춘추관에서 특별감찰반의 민간인 사찰 논란에 조목조목 답했다. 박 비서관은 논란의 인물인 전 특별감찰반원 김태우 검찰수사관이 배속됐던 특감반의 상관이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당 의원총회에서 사진 여러 장을 공개했다. 한글문서 제목이 가득한 컴퓨터 화면을 찍은 것이다. 김 수사관이 작성한 첩보 목록이라고 주장했다. 공교롭게 나 대표는 판사 출신이다.
그러자 박형철 비서관이 직접 브리핑을 하기에 이른다. 한달여 계속되는 특감반 논란 중 박 비서관의 직접 등장은 처음이다. 박 비서관은 한국당이 폭로한 첩보 파일 중 10개를 골랐다. 부적절한 사찰로 의심되거나, 여권 핵심인사를 다뤄 파장이 큰 사안이다.
박 비서관은 자신과 특감반장이 기억하는 한에서 10개 첩보가 언제, 어떻게 생산되고 어디까지 보고됐는지를 설명했다. 고건 전 총리의 아들 고진씨, 우윤근 주러시아 대사,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과 고삼석 방송통신위 상임위원,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표…. 이름과 날짜와 사건이 어지럽게 펼쳐졌지만 설명에 막힘이 없었다. 그는 면도날, 별명처럼 상황을 시작과 끝으로 발라내는 듯했다.
박 비서관은 말미에 "저는 문재인정부 첫 반부패 비서관으로 명예를 걸고 법과 원칙에 따라 업무를 수행해 왔다"라고 말했다. 이때까지 쉴새 없이 흐르던 말이 끊겼다.
박 비서관은 감정이 북받친 듯 울컥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몇 초가 흘렀을까, 심호흡을 한 박 비서관은 "비위 행위자의 일방적 주장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준비한 브리핑은 거기까지였다. 권혁기 춘추관장은 박 비서관에게 "물 한 잔 하시고, 문답을 할까요"라며 분위기를 추슬렀다. 이후는 취재진과 일문일답이었다.
박 비서관은 이내 단호함을 되찾았다. 그는 김 수사관의 활동 관련 민간인 사찰이란 규정을 거부했다. "사찰은 △지시에 의해 △정치적 목적 가지고 △반대하는 사람 따라다니는 게 사찰"이라며 "어떤 지시도 한 적이 없다. 사찰이란 단어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강력 반박했다.
박 비서관은 "(간단하게) 오, 엑스로 물어보겠다"라는 질문에 "싫다. 설명으로 하겠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다만 김태우 수사관의 근태관리에는 "제가 근태관리 책임이 없다고 말씀드릴 자격은 없겠다"라고 몸을 낮췄다. 김 수사관은 2017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감사관으로 옮기려는 문제를 일으킨 후 특감반장은 물론, 박 비서관까지 일일 상황보고를 해야 했다. 업무 초기보다 근태관리를 잘 하려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됐고 청와대 특감반을 겨냥하고 있다.
박 비서관은, 그래도 한때 같이 일하며 턱걸이 시합, 소주 한 잔까지 함께 했던 김 수사관을 존중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브리핑 내내 그를 '김태우 직원' 다섯글자로 호칭했고 답변 내용도 그랬다.
-김태우가 겁박, 협박한다고 느낀 적 있나.
▶김태우 직원이 감찰 받을 때 '나머지 직원들도 골프 쳤다'고 말할 때, 자기도 묻어달라고 겁박하는구나 느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이런 걸 갖고 협박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가상화폐 관련 김 수사관의 보고에 정보 가치가 떨어져서 활용을 안 한 것인가.
▶저희가 쓰는 방향에 맞지 않았다고 하겠다. 직원이 쓴 정보를 폄훼하고 싶지 않다.
청와대는 이날 임종석 비서실장 명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김씨를 고발했다.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다. 청와대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라고 규정했다. 특히 김씨가 민감한 첩보 내용을 여과없이 공개, 명백히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검찰 고발까지 한 이유다.
하지만 김씨의 월권을 제지하지 못한 지휘책임, 민간인 사찰 여부 논란 등 민정수석실 상부는 적잖게 타격을 입었다. 대응과정은 소모적인 공방으로 치달았다. 이날 자유한국당은 야권 인사를 비롯한 교수‧언론·민간 기업 등에 대한 청와대의 전방위적 사찰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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