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양예원 카톡'을 보도했다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 2018.07.11 06:09

스튜디오 실장 투신에 양씨 향한 '여론 재판' 우려…"일희일비 말고 주관·철학 견지해야"

양예원씨와 진실 공방을 벌인 스튜디오 정모 실장(42)이 데이터 복구업체에 의뢰해 복원한 '증거감정서'. /사진=머니투데이DB
2011년쯤인가, 수습기자 때였다. 똥오줌 못 가릴 때다. 기사 하나를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양측 주장이 첨예한 내용이었다. 옆에 있던 선배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선배."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걸 네가 왜 고민해? 둘다 보도하면 되지. 네가 경찰 수사관도 아니고 기자잖아. 있는 그대로 전해." 뒤통수를 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이 일이 다시 떠오른 건 지난 5월 중순쯤이었다. 유명 유튜버 양예원씨(24)와 스튜디오 실장 정모씨(42) 간의 카카오톡 대화를 입수해 처음 봤을 때다. 카톡 대화 상에서 양씨는 정씨에게 촬영 약속을 더 잡아달라 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양씨는 '강제 촬영'을 당했다며 눈물 섞인 호소를 했던 터다. 혼란스러웠다. 믿고 있던 사실이 머릿 속에서 뒤엉켰다. 그때 선배 말이 떠올랐다. 있는 그대로 전하라고. 또 다른 선배 말도 떠올랐다. "설령 살인자라도 반론권은 보장해줘야 한다."

진실이 갈리는 사안이었고, 그렇다면 양측 모두 공정하게 보도하는 게 맞다고 봤다. 양씨 주장은 이미 수많은 언론을 통해 나왔었고, 정씨 주장은 다룬 곳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주장이 아닌 '증거'였다. 여론은 이미 정씨를 가해자로 낙인 찍고 욕을 퍼붓고 있었다. '미투'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래서 사실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럼에도 양씨가 노출사진 유출 피해자인 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주장이 모두 옳다는 보장은 없단 생각이 들었다. 팩트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접근해야 했다. 양씨 말 한 마디로 누군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 그랬다. 의심이 필요했다.

유명 유튜버 양예원씨가 지난 5월17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스튜디오에서 강제촬영, 협박, 성추행 등을 당했다고 울며 호소했다./사진=양예원씨 유튜브 채널
카톡 대화가 조작됐을 가능성을 살펴보려 '증거감정서'도 확인했다. 증거법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채 문서화됐다는 걸 입증하는 서류다. 이는 수사기관에 증거자료로 제출할 수 있다. 해당 카톡 내용은 보도 후 경찰에 증거자료로 제출됐다.

그럼에도 고심이 깊었다. 기사가 나간 뒤 양씨에게 돌아올 파장이 예상돼서였다. 그래서 최대한 사실 관계에 기반한 내용만 전달하려 했다. 양씨가 주장한 내용 중 '강제 촬영'에 대해서만 문제를 제기하고, '성추행·감금'에 대해서는 면밀한 경찰 수사가 필요하다고 선을 그었다. 정씨와 양씨 모두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접촉했지만, 양씨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양씨가 원치 않는 사진 유출로 피해를 겪고 있는 피해자라는 점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기사가 나간 뒤 여론이 들끓었다. 의도는 선입견 없이 사실 관계를 중립적으로 봐달란 취지였건만, 감정적 분노가 앞섰다. 실시간 검색어에 '양예원 카톡'이 이틀씩 올라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파장이 컸다. 정씨를 매장하던 마녀사냥식 여론은 양씨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꽃뱀이다", "좋아서 찍은 것 아니냐"는 억측도 이어졌다. 무고죄를 강화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대거 등장했다. '여론 재판'이 걱정돼 밤잠을 설쳤다.

더 우려스러웠던 건 경찰 수사 관계자 반응이었다. 서울 경찰청 여성청소년 과장(총경)은 보도 직후 "심각한 2차 가해다. 피의자가 여론전 하느라 뿌린 걸 그대로 보도했다. 경찰에 제출되지도 않고 진위도 모르는 것"이라며 보도를 '배설'이라고 비판했다. 전형적 회유, 협박, 물타기라고도 했다. 경찰 말이라 믿기 힘든, 황당한 내용이었다. 경찰에 제출되지 않은 내용은 언론이 언급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언론 본연의 감시 기능을 무력화하는 발언이었다.

심각한 건 피의자에 대한 '무죄 추정의 원칙'을 경찰이, 그것도 수사를 맡고 있는 주무과장이 깼다는 사실이었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얘기긴 하지만 수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이후 시간이 한 달 반 지나는 동안 경찰 수사는 계속 진척됐다. 그 사이 스튜디오 촬영 피해자는 8명으로 늘었다.

유명 유투버 양예원씨의 '비공개 촬영회' 사건으로 경찰 수사를 받던 스튜디오 운영자 정모씨(42)가 '편파보도'와 '모델들의 거짓말'을 주장하며 북한강에 투신했다./사진=뉴스1
양씨 사건은 새 국면을 맞았다. 지난 9일 오후 3시쯤 팀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인터넷을 하는데, 기사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정씨가 투신했다는 소식이었다. 아직도 실종 상태인 그가 남긴 건 유서 한 장이었다. '경찰도 언론도 그쪽 이야기만 듣는다. 억울하다'는 내용이었다.

프로파일러(범죄심리 전문가)들은 정씨가 감당이 안되는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을 것이라 봤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찰 수사가 시작되고 여론 나빠지고 이런 경험들이 자기에게 최악이었다 생각할 수 있다"며 "개인 평판, 금전적 손실, 향후 사업에 있어서의 가능성 등을 종합해 평가해보면 상당히 암담하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기가 얘기한다 해도 사회적 분위기, 언론, 경찰이 자기 얘기를 들어줄 여건이 안되는 상황에 절망했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정씨가 투신하면서 비난 화살이 다시 양씨를 겨냥하고 있다. 모든 일이 촉발됐으니 책임지라는 식이다. 스튜디오 사건 관련 청원을 알렸던 수지에게도 마찬가지다. 사실 관계 파악에 대한 고민보다는, 감정과 분노가 앞서는 여론이 아쉽다.

사안이 생길 때마다 우르르 쏠리는 '여론 재판'은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억울한 피해자만 낳을 뿐이다. 성숙한 여론 의식이 필요한 때다. 오 교수는 "대중들은 항상 공격할 대상을 찾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동물"이라며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주관이나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그런 걸 견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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