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내 강의를 바꾼 강의평가

머니투데이 김화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 2014.11.26 08:00
매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하는 강의평가가 있다. 정성들여 열심히 작성하는 학생도 있고 거의 개인적인 불만을 피력하는 수준의 강의 평가도 있다. 다른 교수들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나는 의무로 여겨서 마지못해 본다. 크게 개선될 여지도 없는데 안 좋은 것들로부터 상심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지금까지 두 학생의 강의평가가 기억에 남는다. 그 두 학생의 강의평가는 내 수업을 크게 변하게 했고 교수로서의 내 인생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첫 번째 것은 경영대학에 출장강의를 나갔을 때 생긴 일이다. 교수들은 가급적이면 수업을 재미있게 진행하고 싶어 한다. 학생들이 지루해 하면 수업 분위기도 뜨지 않고 학습 효과도 떨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곳곳에 농담을 섞기도 하고 시청각 교재도 사용된다. 파워포인트는 필수처럼 되어 간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학기가 끝나고 한 학생의 강의평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번 학기 담당 교수님의 강의는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다.”

학생들은 영화 한 편 보듯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강의실에 오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혼자 습득하기 어려운 것을 강의와 동료들과의 공동학습을 통해 배우러 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재미있어 하고 지루해 하지 않게 하는 것에 지나치게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강의 준비와 재미있는 강의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쏟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옛날 교수님들 중에 본인이 저술한 책을 들고 들어와 같이 한 줄씩 읽는 경우가 어쩌면 충실한 수업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란 본질적으로 어려운 과정인 것이다. 어쨌든 그 후로는 조금 지루하더라도 수업시간이 더 실속있는 시간이 되도록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두 번째는 미국에서 강의할 때 일어났던 일이다. 미국의 로스쿨 에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수업을 잘 진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보다 훨씬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또, 우리 학생들과 달리 질문이 많고 말도 많다. 거기에 대처할 준비도 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의 완벽한 강의안을 준비했다. 학생들의 예상 반응과 그 경우의 수 각각에 따른 대응 등등.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강의를 일주일 내내 준비해야 했다. 아무리 내가 외국인 교수지만 영어가 신통치 않다는 인상을 주기는 싫었기에 완전한 영어를 준비하는 데 추가적으로 막대한 노력이 들어갔다. 강의평가에서 하위권에 들면 곤란하다. 물론, 상위권에는 테뉴어에 목을 매는 소장교수들이 주로 자리하고 있고 하위권에는 주로 세계적인 석학들이 포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를 세계적인 석학으로 보아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학기 강의 평가에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프로페서 킴은 영어에 덜 신경 쓰면 훨씬 더 좋은 강의가 될 것 같다.” 이 한 줄의 평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답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이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거의 자체 동시통역과 같은 방식으로 강의를 했다. 그렇게 하니 내가 알고 있고 준비한 것들이 거의 다 전달이 되었다. 영어를 완전하게 준비하느라 유연성도 떨어지고 딱딱했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영어를 따로 준비하지 않은 다음부터는 깊이 있는 내용의 수업도 가능해졌고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조크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실로 찾아오는 학생의 수도 늘어났다. 도대체가 이전에는 학생들이 내가 석고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이제는 우리 학생들 영어강의가 더 힘들다. 미국 학생들은 내가 잘 못 말하면 바로 고쳐서 알아들어버리지만 우리 학생들은 그렇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매사에 본질이 가장 중요하고 포장보다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국어로 가장 깊이 생각할 수 있다. 필요하면 상대가 애써 알아들으려 노력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내 말에 그럴만한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학생들이 이 평범한 진리를 강의평가를 통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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