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임에도 20~50대 주부, 엄마와 함께 온 어린이, 간혹 보이는 외국인들까지 50여 명이 입소문과 눈소문을 타고 한꺼번에 몰려든 것.
"어머, 1970년 신동아 잡지를 발견했어요." 한 40대 여성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떼자, "책 사이에 이 메모 좀 봐봐, 재밌는데?"하는 어느 30대 여성의 수다도 이어졌다. 책에 깃든 신기한 장면과 오랜 사연까지 훑던 주부들의 시선이 동시에 멈춘 곳은 8m 높이로 세워진 서가. "저 꼭대기 책은 어떻게 꺼내 보나요? 책은 또 어떻게 찾아요?"
'지혜의 숲'이 가장 자랑하는 이 서가에 순간 발걸음을 멈춘 주부들. 뭐가 그리 즐겁고 궁금한 게 많은지, 둘러보던 사람들은 '권독사'라는 이름표를 목에 건 자원봉사자를 찾아 질문하기 바빴다.
서가는 기증도서 50만여 권 중 20만 권 정도로 먼저 꾸려졌다. 유통사와 출판사를 비롯해 석경징(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유진태(재일 역사학자), 유초하(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한경구(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홍진경(미술사학자) 등 학자 30여 명이 기증한 책들이 우선 배치됐다.
책들은 기증자들의 일상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뭔가를 적어둔 메모나 편지, 오랜 달력, 잡지 등 부속물이 책과 함께 딸려와 보는 이에게 또 다른 기쁨을 주기도 한다. 이곳은 1·2·3구역으로 구성된 '지혜의 숲'의 1구역에 해당한다.
2·3구역은 출판사 기증도서 코너로 한국 대표 출판사들이 지금까지 펴낸 책들을 출판사별로 모았다. 각 출판사의 역사와 특징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어린이 책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아래 칸에 두었다. 3구역은 '지지향' 로비에 꾸며졌으며 24시간 개방한다. 1·2 구역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한다. 연중무휴 문 여는 이 도서관은 우선 한 구역만 24시간 운영하면서 이용자들의 반응을 보겠다는 것이다.
이날 야외 테라스에선 한 사람이 열심히 소리 내어 동화책을 읽고, 다른 한 사람은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마치 동화구연대회의 한 장면 같다. '어린이도서연구회' 인천지부 회원들이라는 여성 4인방은 중·고등학생 자녀들을 등교시키고 인천에서 막 건너온 참이었다.
파주에 매력을 느껴 자주 온다는 김현숙 회원은 "도서관이 이렇게 고급스럽고 한적할 줄 몰랐다"며 "엄마들이 아이들 데리고 와서 같이 책 읽으며 교육하기에 이만큼 좋은 곳이 없을 것 같다"고 감탄했다. 또 "앞으로 '작가와의 만남'이라든가 대중성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될 것"이라며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구상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혜의 숲'이 다른 도서관과 크게 다른 점은 무얼까. 우선 이곳에는 도서검색용 PC가 없다. 전자책도 없을 뿐 아니라, 출입구에 도난방지 시스템이 장착돼 있지 않다. 온전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셈이다.
정병규 책임연구원은 "지식의 보고이자 아카이브 형태로, 직접 눈으로 보고 책을 꺼내 만지고 읽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우세했다"며 "지혜의 숲 자체가 성숙된 시민의식을 함께 키워가자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이용자들을 믿고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CCTV도 있고, 무엇보다 서가마다 권독사들이 책을 지키고 있다. 꼭 찾고 싶은 책이 있을 때도 권독사에게 문의하면 된다. 이용자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저 높은 곳에 책은 어떻게 꺼내보느냐"다.
가장 높은 서가는 8m로 모두 16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10단까지는 트레일러를 이용해서 올라가 꺼낼 수 있고, 권독사들의 도움을 받아 이용자가 직접 올라가서 볼 수도 있다. 11단 이상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채 꽂혀있는 경우도 있고, 같은 책이 여러 권일 경우 한권만 아래쪽에 두고 나머지는 위로 올려두기도 했다. 또는 기증자가 열람보다는 '소장'을 부탁한 경우 위쪽에 배치했다.
'글이 피어나는 곳'이라는 뜻의 지명 '문발동'에는 수십 만 권의 책과 함께 '지혜의 숲'이 자라나고 있었다. 지난 19일 개관 이후 주말 3일간 이 곳을 찾은 방문객만 4만 명이 넘었다. 오는 9월 30일까지는 '책 속으로, 김혜련의 병풍놀이'라는 제목으로 김혜련 작가의 회화와 설치작품이 서가와 어우러져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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