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등 근현대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 중인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그림들은 어릴 적 이런 기억을 되살렸다. 이 대가들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접히고 찢긴 자국, 곰팡이가 핀 자국인지 원래 좀 지저분한 종이였는지, 가난한 시절과 지나온 세월이 눅눅히 묻어나 있었다. 지웠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숱한 연필 자국 등은 작가의 처음 마음을 생각해보게 하니 정겹기도 하다.
갤러리현대가 다음달 9일까지 신관과 본관을 아울러 마련한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 전시는 근현대 대표작가 30인의 종이작품 132점을 집중 조명하기 위해 기획했다. 유화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았던 종이 작업은 화가에게는 사실상 가장 기본적인 최초의 단계로 작가의 예술세계를 담백하고 솔직하게 보여주는 장르다.
가난한 시대를 살았던 화가 이중섭은 종이 작품만 남아 있고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을 정도다. 아내에게 보낸 연애편지도 글 대신 그림으로 대신했던 화가는 종이조차 여의치 않을 땐 담뱃갑 은박지 위에 그리기도 했다. 박수근도 마찬가지. 그림 값 대신 물감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재료 구하기도 힘든 현실에서도 처절하게 예술혼을 불태웠다.
'설악의 화가'로 알려진 김종학은 이 닦는 모습의 자화상이나 여체 누드 등 인체에 대한 실험을 종이에 수채화로 그렸다. 김환기는 일기를 쓰듯 매일 종이에 연습했고, 조각가인 김종영과 권진규, 최종태가 종이에 그린 크로키는 조각 작품 못지않은 형태감과 질감 느낌을 준다. 천경자는 종이에 사이펜으로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서 갤러리 입구 벽에 쓰여 있는 이 글을 다시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 화가의 작품이 수채화든 과슈든, 종이에 드렸건 천에 그렸건 그건 예술가가 자기의 예술혼을 쏟아내기 좋은 재료의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전시관람은 무료,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가는 △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박생광 △김종영 △권진규 △이응노 △김환기 △장욱진 △최영림 △천경자 △최욱경 △오윤 △최종태 △김종학 △남관 △한묵 △곽인식 △권영우 △정창섭 △윤형근 △김창열 △서세옥 △박서보 △정상화 △이우환 △김기린 △함섭 △전광영 △신성희. 문의 (02)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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