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릴 수만 있다면···

머니투데이 이언주 기자 | 2014.02.12 06:15

갤러리현대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展··· 다음달 9일까지

이중섭, 닭과 게, 종이에 유채·연필, 29x41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어린 시절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나서, 종이를 둘둘 말지 않고 반으로 뚝 접었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다. 종이가 포개지며 크레파스나 물감이 묻어나기도 하고, 일단 그림 한 가운데로 줄이 생기니 실컷 그려놓고 그림을 망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등 근현대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 중인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그림들은 어릴 적 이런 기억을 되살렸다. 이 대가들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접히고 찢긴 자국, 곰팡이가 핀 자국인지 원래 좀 지저분한 종이였는지, 가난한 시절과 지나온 세월이 눅눅히 묻어나 있었다. 지웠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숱한 연필 자국 등은 작가의 처음 마음을 생각해보게 하니 정겹기도 하다.

갤러리현대가 다음달 9일까지 신관과 본관을 아울러 마련한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 전시는 근현대 대표작가 30인의 종이작품 132점을 집중 조명하기 위해 기획했다. 유화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았던 종이 작업은 화가에게는 사실상 가장 기본적인 최초의 단계로 작가의 예술세계를 담백하고 솔직하게 보여주는 장르다.

가난한 시대를 살았던 화가 이중섭은 종이 작품만 남아 있고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을 정도다. 아내에게 보낸 연애편지도 글 대신 그림으로 대신했던 화가는 종이조차 여의치 않을 땐 담뱃갑 은박지 위에 그리기도 했다. 박수근도 마찬가지. 그림 값 대신 물감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재료 구하기도 힘든 현실에서도 처절하게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중섭, 은지화, 은지에 새김, 유채, 8.2x15.2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박수근, 군상, 1961, 종이에 연필과 채색, 21.5 X 55.2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김종학, 누드, 1987, 종이에 수채, 12x17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처럼 가난한 화가들에게 종이 한 장은 혼신을 담아낼 수 있는 소중한 캔버스였다. 종이도 각양각색이다. 한지처럼 얇은 종이가 있는가 하면 종이죽에 가까운 두껍고 질퍽한 종이도 있고, 물감의 농도 때문에 우글거리거나 붓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종이, 은박종이 등 다양하다. 크기도 손바닥마한 것부터 다양하다. 또 연필 데생이나 크로키, 수채화를 비롯해 먹이나 과슈(불투명 수채물감)를 사용한 작품 등 종이 위에 구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시도했던 화가들의 노고가 느껴진다.

'설악의 화가'로 알려진 김종학은 이 닦는 모습의 자화상이나 여체 누드 등 인체에 대한 실험을 종이에 수채화로 그렸다. 김환기는 일기를 쓰듯 매일 종이에 연습했고, 조각가인 김종영과 권진규, 최종태가 종이에 그린 크로키는 조각 작품 못지않은 형태감과 질감 느낌을 준다. 천경자는 종이에 사이펜으로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서 갤러리 입구 벽에 쓰여 있는 이 글을 다시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 화가의 작품이 수채화든 과슈든, 종이에 드렸건 천에 그렸건 그건 예술가가 자기의 예술혼을 쏟아내기 좋은 재료의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전시관람은 무료,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가는 △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박생광 △김종영 △권진규 △이응노 △김환기 △장욱진 △최영림 △천경자 △최욱경 △오윤 △최종태 △김종학 △남관 △한묵 △곽인식 △권영우 △정창섭 △윤형근 △김창열 △서세옥 △박서보 △정상화 △이우환 △김기린 △함섭 △전광영 △신성희. 문의 (02)2287-3500.

천경자, 자화상, 1969, 종이에 사인펜, 40.8x26cm / 최종태, 여인, 2012, 종이에 먹과 수채, 37x25cm / 이인성, 부인상, 1947, 종이에 수채, 53x38cm (왼쪽부터) /사진제공=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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