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스크바에 일이 있어서 다녀왔는데 좋은 콘서트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바로 '제4회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페스티벌(IV International Mstislav Rostropovich Festival)'이다.
이 페스티벌은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거장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M. Rostropovich, 1927-2007)를 기리기 위해 그의 딸이 만든 페스티벌이다.
올해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아내인 소프라노 '갈리나 비시네프스카야를 추모하며' 라는 부제와 함께 3월 27일부터 4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상트-뻬쩨르부르그의 콘서트홀에서 진행됐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소설가 솔제니친을 옹호하여 은신처를 제공해주는 등 민주주의적 가치와 자유를 위해 언제나 힘썼다. 그 결과 그와 그의 부인은 해외 연주회를 금지당한 채 감시 속에서 모진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결국 1974년 출국 후 귀국하지 않았으며 다음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8년엔 소련에 대한 비판적 행동으로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다른 나라의 국적을 받지 않고 자신의 조국 러시아를 사랑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소프라노이며 볼쇼이 오페라단의 간판가수였던 갈리나 비시네프스카야(Galina Vishnevskaya, 1926-2012) 역시 그런 남편을 헌신적으로 보필했다.
모스크바에 가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꼭 '순례'하는 곳이 있다. 바로 나의 모교인 모스크바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이다.
이 음악원은 1866년 러시아음악협회 모스크바지부의 음악교실로 설립이 되었는데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이 초대교장이었다. 한때 차이코프스키도 이곳에서 화성학이라는 이론 과목을 가르쳤었다.
1940년 국립이 되면서 현재의 모스크바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으로 개칭되었는데 이곳에는 3개의 콘서트홀이 있다. 그 중 가장 큰 홀이 볼쇼이 잘(Bolshoi zal)인데 직역을 하면 큰 홀이라는 뜻이다. 말 그 대로 가장 큰 홀로 2000석 정도인데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특이한 점은 홀 양 옆에 작곡가들의 큰 초상화가 쭈~욱 걸려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연주를 하다보면 이 위대한 작곡가들이 모두 날 지켜보며 얼마나 잘하는지 심판하는 것 같아 위축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주 연주를 하다보니 어느새 이들의 눈빛이 너무나 친근해지고 오히려 다른 홀에서 연주를 할 때 그 감시의 눈빛이 그리워지기도 했었다.
이 콘서트홀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가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4년에 한 번씩 콩쿠르가 열리면 음악원 학생들은 한 달 빨라진 시험기간때문에 소위 '멘붕'이 되곤 한다.
특히 그 해가 졸업시험일 경우는 더더욱 심신의 고통이 가중된다. 음악원의 큰 홀, 작은 홀이 모두 학생들의 시험이 치러지는 곳이기도 한데 콩쿠르의 날짜가 학년말 시험 날짜와 비슷하기 때문에 시험 날짜를 조정할 수 밖에 없다. 콩쿠르 준비를 위해 음악원 시험은 한달 씩 앞당겨지고 그 시험을 준비하는 졸업반들은 턱없이 부족한 준비시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된다. 나도 겪었던 그 일들이 엊그제 일 같이 떠오른다.
모스크바의 콘서트홀에는 또하나 특이한 곳이 있다. 바로 내부 회랑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물품보관소이다.
다른 홀들에서는 이렇게 큰 공간의 물품보관소를 본 적이 없다. 이유인즉 모스크바는 겨울이 길어서 콘서트 시즌인 겨울이면 털 코트와 털 부츠를 맡길 곳이 필요해서 이렇게 엄청나게 큰 공간이 물품보관소로 쓰이는 것이다.
러시아 여자들은 콘서트에 구두까지 챙겨온다. 특히 할머니들이 심하게(?) 예의를 갖추는데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멋있는 정장을 입고 목걸이, 귀걸이로 한껏 멋을 내고 두꺼운 털코트로 중무장을 한 후 홀에 들어오면 가지고 온 구두를 꺼내 신고 털부츠는 준비해온 가방에 넣어서 작은 손지갑을 제외한 모든 것을 털코트와 함께 맡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을 즐기러 들어간다. 클래식의 드레스코드를 확실히 지키는 것이다.
그날 학교에서 아직도 일하고 계시는 교수님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좋은 연주 있는데 내일 저녁 시간 되나?" 라는 물음과 함께 초대권을 받았다.
요즘 한국에서 가장 '핫'한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와 바바리안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였다. 거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연주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공연은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가야지...
오랜만에 모스크바에 듣는,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이었다. 감회가 새롭고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연주였다. 17년을 러시아에서 보낸 내게 러시아는 제2의 고향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감수성과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어낸 작곡가들을 너무도 사랑한다.
이날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은 1악장부터 단호한 칼바람과 같은 군무를 연상케 하는 단단한 연주였다.
그리고 이어진 프로코피예프와 스트라빈스키는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관악기와 타악기, 또 스트라빈스키의 불새가 주는 정확한 리듬감에 의해 "아, 이래서 얀손스가 세계 최고라고 하는구나..." 라고 고개를 계속 끄덕이게 만들었다.
특이한 것은 곡마다 오케스트라의 악기 배치를 다르게 해서 더욱 청중에게 좋은 음악을 선사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더블베이스가 일반적으로 객석에서 볼 때 오른쪽에 위치하지만 이날은 베토벤 심포니를 연주할 때는 정반대 왼쪽에 위치했다.
이렇게 악기배치가 달라지는 이유는 지휘자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운드를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악기들의 배치를 곡마다 달리 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좋은 공연을 보며 가슴이 벅차 올랐다. 무대에 걸려있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가 연주하는 따뜻한 첼로 소리가 그리워졌다. 모스크바의 추위를 녹이는 음악의 따스함이...
모스크바를 다녀온 뒤 4월인데 서울에서 때아닌 진눈깨비를 볼 수 있었다. 눈이 오면 내 성장기 16번의 겨울을 보낸 '제 2고향' 모스크바가 생각난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밤마다 두꺼운 털코트를 입고 털부츠를 신고 동화속 공간 같았던 환상의 세계, 음악회를 다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번 마리스 얀손스의 연주는 더더욱 모스크바 음악회에 대한 그리움을 더 해주었다. 다음엔 한국에서 그를 보러 가야겠다.
☞ '송원진,송세진의 소리선물' 콘서트 4월21일 광화문 KT올레스퀘어 드림홀
◇ 클래식도 즐기고 기부도 하는 <착한 콘서트> <송원진·송세진의 소리선물>콘서트가 매월 세번째 일요일 오후 1시 서울 KT 광화문지사 1층 올레스퀘어 드림홀에서 열립니다. 이 콘서트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 힘든 클래식 콘서트의 티켓 가격을 5천원으로 책정하고, 입장료 수익금 전액을 어려운 가정의 청각장애 어린이 보청기 지원을 위해 기부합니다. 4월 공연은 21일 일요일입니다. 예매는 인터넷으로 가능합니다. ( ☞ 바로가기 nanum.mt.co.kr 문의 02-724-7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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