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힘, 전태일

머니투데이 실리콘밸리=유병률 특파원 | 2013.01.01 06:00

[유병률의 체인지더월드] <28> 재미교포 여성창업가 조이스 김

조이스 김(위쪽)과 세계적 유머사이트 'I Can Has Cheezburger' 창업자 에릭 나카가와. 두 사람은 지난해 여행 및 호텔정보 사이트 심플허니닷컴을 공동 창업한데 이어 최근 전자상거래 사이트 론칭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샌프란시스코=유병률 기자
뉴욕태생, 16세에 코넬대 조기입학, 하버드대 역사학 석사, 콜롬비아대 로스쿨, 뉴욕 대형로펌 변호사,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창업가. 이 정도면 미국 주류사회에서도 빠지지 않는 프로필이다.

북미 최대 한류사이트 숨피닷컴(Soompi.com) CEO를 거쳐 여행사이트, 전자상거래사이트를 잇달아 창업한 재미교포 여성창업가 조이스 김(34). 나무랄 데 없는 주류의 커리어이지만, 그의 20대 히스토리에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후 그의 삶은 바뀌었고, 그의 삶은 지금 세상을 바꾸고 있다. 세계 IT의 중심 실리콘밸리에서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말이다.

“전태일을 알게 되면서 한국을 배웠다”
하버드대학원에서 공부하던 2000년 무렵, 조이스 김은 우연히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자랑스럽게만 생각해왔던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과는 다른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곧장 민주노총으로 향했다. 한국말을 배워가며 민주노총과 참여연대에서 1년여 일했고, 한국노동운동사와 시민운동을 공부했다.

“그분들의 활동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대한민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오신 분들이죠. 전태일이 아니었다면 한국사회를 바꾸어온 평범하지만 진짜 영웅들의 역사를 몰랐을 겁니다.”

미국으로 돌아와 전태일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쓴 그는 콜롬비아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원래 박사과정까지 마칠 생각도 있었지만, 그는 “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역량을 갖춰야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진로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계기가 되었던 터.

이후 뉴욕의 대형로펌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전태일만큼이나 충격적인 거대한 흐름을 목격하게 되었다. 바로 테크놀로지의 진보와 그 진보가 만들어내는 사람들간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그래서 이번에는 실리콘밸리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터넷 안의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실리콘밸리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한류 콘텐트를 전세계에 소개했던 숨피닷컴(Soompi.com)을 4년 동안 이끌었고, 유명 IT매체 기가옴(GigaOm)에서 위키피디아, 테크크런치, 판도라 등 실리콘밸리의 쟁쟁한 IT기업 CEO들을 인터뷰하는 쇼도 1년 동안 진행했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유머사이트 ‘I Can Has Cheezburger(나는 치즈버그를 가질 수 있다)’를 창업해 매각한 에릭 나카가와와 의기투합해 여행 및 호텔정보 예약사이트 심플허니닷컴(simplehoney.com)을 창업했고, 전자상거래 사이트도 준비 중이다.

그는 돈도 많이 벌었다. 앞으로도 더 많이 벌 계획이다. 대신 전태일의 삶에서 보고 느낀 대로 쓰고 있다. 빈민청소년 교육단체와 아동구호단체, 민주주의와 사법 정의를 실천하는 단체에 그는 번 돈의 거의 대부분을 기부하고 있다. “돈 버는 것은 잘할 자신이 있어요. 앞으로도 더 많이 벌 거고요. 많이 벌어서 이들 단체에 더 지원할 겁니다. 이것이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인 거죠.”

“인터넷 테크놀로지에서 전태일을 다시 만나다”
그는 ‘전태일이 지금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묻는 질문에 “(IT회사를 경영하는) 지금도 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답했다.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Everyday People)이고, 진정한 영웅들도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기회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죠. 단 25%만이라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세상은 더 좋은 곳으로 바뀝니다. 인터넷과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Everyday People에게 더 많은 자유와 소통을 제공하기 때문이죠.”


그는 전태일 같은 평범한 영웅들이 더 이상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세상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길이 인터넷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창업가들에게도 한마디 덧붙였다. “기업을 시작할 때면 가입자정보를 이용하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거죠. 개인의 자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그래서 인터넷 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겁니다. 가입자정보를 마케팅에 이용하려는 페이스북이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많은 창업가들이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리는 나의 사소한 결정 때문에 그런 비전이 점점 더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조이스 김은 "책이 인류역사를 바꾸었듯이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단, 전제는 말 할 수 있는 자유, 만들수 있는 자유가 완벽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

“한국 인터넷에는 진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는 “인터넷 발달 정도만 보면 한국은 세계최고이지만, 정작 세계적 기술혁신, 세계적 스타트업, 세계적 소프트웨어는 없다”며 “그 이유를 잘 따져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한국조직 전반의 관료주의 때문이겠죠. 우리가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전문가 시각도 필요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시각도 필요한 법입니다. 날 것 그대로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관료주의는 끼리끼리 토론해서 결론내리기 십상이지요. 더욱이 관료주의 기업문화는 위험을 꺼리기 때문에 변화의 속도가 늦습니다. 빨리 변화하려면, 빨리 실패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든요. 하지만 한국기업들은 실패를 하지 않는 변화만 추구하는 것이죠.”

하지만 관료주의보다 더 큰 문제로 그는 “인터넷에 대한 규제와 통제”를 꼽았다. “애플이 데이터컴퍼니라면 삼성은 아직 하드웨어컴퍼니입니다. 아이폰을 구입하면 아주 쉽게 기기들간 동기화할 수 있지만 갤럭시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소프트웨어를 구현하고, 데이터를 통합하고 연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삼성이 이를 시험하고 검증하기에는 한국의 인터넷과 모바일에 충분한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터넷실명제(2011년 8월 헌법재판소 위헌결정으로 5년 만에 비로소 사라졌다)와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편중된 웹브라우저 사용 등이 대표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인터넷은 어떤 경계도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은 디지털 경계를 갖고 있어요. 정부가 정보를 통제하기 편하고 기업들이 관리하기 편하기 때문이죠. 이런 환경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자신이 만들거나 사용하고 싶은 서비스를 차단당하게 되고, 또 이런 환경에 익숙한 스타트업들은 해외에 나가서 경쟁력을 갖기 어려운 것이죠.”


실리콘밸리에서, 그것도 잘나가는 IT창업가로부터 ‘전태일’, ‘민주노총’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곳의 많은 창업가들이 비록 ‘사악해지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언제나 큰 돈 버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인 것이 현실. 그러나 조이스 김과 그의 동료들한테서만큼은 키보드 위의 민주주의, 모바일 터치스크린 위의 자유, 그래서 진짜 세상을 바꾸려는 꿈을 확인하게 된다.

2013년 한국은 새 정부가 들어선다. 많은 것이 바뀔 수도 있고, 많은 것이 그대로 일 수도 있다. 아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는 먼 이국 땅 재미교포 창업가 한 사람이 전태일의 삶을 테크놀로지 시대에 새롭게 구현해가며 들려준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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