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의 기술

머니투데이 김준형 증권부장 | 2010.09.30 08:08

[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세상의 변화와 함께 많은 직업들이 새로 생겨난다.
삼성 LG 현대차 같은 대그룹 뿐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맨손으로 기업을 일궈온 수많은 중소 중견 기업인들이 은퇴를 앞두게 되면서 '가업승계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생겼다.

기업이나 조직을 한 세대로 끝낼 것이 아닌 이상 '승계'(혹은 세습)이라는 말을 적대시할 필요는 없다. 기업의 '승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후세대에서 몰락하게 된다면 해당 기업의 경영자 뿐 아니라 기업을 키워낸 사회로서도 큰 손실이다.

저차원적으로 생각하자면 어떻게 하면 세금을 줄여 자식에게 더 많은 몫을 물려줄까 하는게 승계의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재산을 상속해 주는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기업'을 전승시키고자 한다면 세습도 기술이 필요하고 컨설팅도 받을만 하다.

경영학 구루인 피터 드러커도 "후계자를 얼마나 잘 선택하는지와 그 후계자가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도록 권한을 잘 이양하는 것은 CEO의 마지막 시험"이라고 했다. 실제로 잘 나가던 CEO가 마지막 시험에서 걸려 평생의 업적에 생채기를 내는 사례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멀리 거슬러 갈 것도 없이 신한은행 라응찬 회장이 떠오른다.

실패한 '승계'의 특징은 서로 의심하고 견제하는 구조를 물려 준다는 점이다. 외형적으론 잘 버텨온 것 같지만, 자생력과 자발성, 조직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다져 놓지 못한 탓이다. 최고 경영자는 승계 이후에도 자신을 내치지 않을 후계자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상호 감시와 견제 체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조직의 밑바닥에서부터 경험을 쌓은 후계자는 성공할 가능성이 크고 그런 기업에는 투자할만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는게 투자전문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장인환 KTB 자산운용 사장은 "누구든 자신을 떠받드는 분위기에서 성장한 후계자가 갑자기 조직을 떠 안게 되면 5년내에 사고를 친다"고 말한다.

'승계=죽음'으로 생각해, 죽음을 눈앞에 두기 전까지는 승계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승계의 가장 큰 원칙 가운데 하나는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권상훈 한국 기업승계 컨설팅 대표는 "창업자의 나이와 승계를 생각하지 않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가다 남은 사람들까지 피해자로 만든다"고 말한다.

우리는 또 하나의 '위태로운 승계'를 목격하고 있다.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중앙군사위의 부위원장에 셋째 아들 김정은을 올려 놓고 '대장'을 시키면서 후계작업을 공식화했다.

군대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여동생 김경희 등에게도 '대장'을 달아주면서 잠재적 불만세력들을 견제하도록 했다. 전형적인 '불신형 승계'이다. 황태자로 자란 까까머리 청년을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대장'으로 벼락 승진시킨 것은 '혈연 최우선 세습'이다. 나이 일흔이 다 되도록 권력을 잡고 있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죽음의 그림자가 닥쳐서야 부랴부랴 세자책봉에 나선 것은 준비되지 않은 '벼락 승계'이다.
'세습의 기술'이라는 잣대로 보면 도대체가 잘 될 턱이 없는 엉터리 승계작업인 것이다.

문제는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와 직결되는 사안이라는 점이다. 세습 실패시 따를 혼돈과 이로 인한 한반도의 위기, 비용을 생각하면 아찔할 수 밖에 없다.

벌써부터 일부 서구 언론은 김정일의 3대 세습을 한국 대기업들의 경영권 세습과 연결 짓고 있다. '엉터리 세습'이 남과 북, 정치와 경제를 망라한 한국의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전통으로 각인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존 F 케네디 미국대통령도 존경했다는 일본 에도시대 요네자와 번(藩)의 번조 우에스기 요우잔(上彬鷹山)는 35세에 번주 자리를 물려주면서 '전국의 사(傳國의 辭)', 즉 '나라를 물려주며'라는 글을 남겼다.
"나라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백성은 군주의 사물이 아니다. 군주를 위해 나라와 백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경영학자 이타미 히로유키(伊丹敬之)는'나라' 대신 '기업'이라는 말을 넣는다. "기업은 선배 경영자로부터 현 경영자에게 전해지고, 후세에 남겨야 한다, 기업 구성원은 기업에 소속돼 있지, 경영자 개인에게 고용된 사람이 아니다" 는 것이다.
권력이건 기업이건 '승계'를 생각할 때 되새겨 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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