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키호테 오바마를 지켜보며"

황인선 KT&G 북서울본부 영업부장 | 2010.02.02 12:10

[마케팅톡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진실의 소리

“나를 짓밟은 그놈들보다 당신이 더 잔인해. 그동안 내 가슴엔 분노가 있었지만 당신을 만나고 내 가슴엔 절망이 들어찼어. 돈키호테.” 주막집 창녀 알돈자가 노새몰이 남자들한테 윤간을 당한 다음날 망신창이가 된 몸을 질질 끌고 돌아와서 돈키호테에게 절규합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고귀한 둘시네아가 아니야. 부모 이름도 모르는 창녀 알돈자라구. 제발 꺼져.”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2막의 알돈자 절규대목인데 기사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어 자신을 불의에 가득한 세상과 싸우는 기사라고 착각한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는 주막집을 성으로 착각하고 거기서 뭇 남자들에게 농락당하던 알돈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녀를 성녀 둘시네아로 부릅니다.

평생 비천하게 살아왔던 알돈자는 희망에 부풀고 평생 한번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아 희망의 샘물을 움켜쥐었지만 그것은 신기루였고 알돈자 그녀의 손에는 더러운 노새 똥만이 쥐어지는 이 현실에서 관객들은 알돈자를 유린하는 노새몰이들에게 분노하다가 침묵합니다. 미국식 해피엔딩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에게 유럽원작의 뮤지컬들은 때로 고통스런 각성을 요구하죠.

사실 세르반테스는 알돈자보다 더한 삶을 산 작가입니다. 평생 학교교육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해전에 참가해서 왼손과 가슴에 총상을 입고 귀향하다가 해적에게 잡혀 5년 이상 노예생활을 했으며 세무관 일을 하면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분노보다 잔인한 절망의 세월을 딛고 몸종 산초가 대표하는 물질주의와 맞서서 이상주의자의 길을 살았던 세르반테스는 극중에서 현실을 모른다고 비웃는 군중들에게 ‘무엇이 과연 현실인가?’라고 묻고 ‘현실은 진실의 적’이라고 외칩니다.

이 대목에서 관객들은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세상 좀 알만 하자 무수히 들어왔던 그런 외침이 이젠 진부할 만하건만 뮤지컬을 보는 내내 왜 그리 망치처럼 무겁게 가슴을 때리는지. “한 눈은 뜨고 한 눈은 감아. 그래야 안 다쳐.”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눈박이는 장애인이야.” 현실과 진실사이에서 나름 균형감을 갖고 살아오느라고 살아왔다고 믿었었는데.

미국에서 조사를 해보니 CEO중 70%가 ‘가면(假面)의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뜻밖인데 그러나 그 가면은 현실에서는 성공을 거둔 파워가면입니다. 가면을 쓰더라도 성공하고 싶은 게 현실일 텐데 세르반테스가 간지 400년이 된 지금 검은 얼굴의 돈키호테가 나타났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폴 볼커 경제회복자문위원장을 힘 삼아 미국 금융사들의 가면에 창을 겨눈 것은 돈키호테가 풍차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국 금융사와 오바마 그 중 누가 현실이고 누가 진실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으나 월가의 파생상품 신화가 무너지고 골드만삭스가 임원 보너스를 줄이겠다고 뒤늦게 물러섰던 것을 보면 당장은 라만차의 기사 오바마가 창의 자루를 잡은 것 같지만 곧 알돈자의 고통스런 절규가 터져 나올지도 모르죠.


“오바마, 당신이 말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었지만 이제 남은 것은 절망뿐이야”, “그들은 강하다고. 현실을 봐. 우리는 둘시네아가 아니야.” 당장 세계 증시가 곤두박질을 칩니다. 영리한 사람들이니까요.

영리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돈키호테가 잠깐 보여주는 진실의 섬광을 기억에 가둔 채 질긴 현실의 완강함 속에서 굴러다는 것을. 진실보다 현실에서 먹을 게 더 많다는 것도.

그럼에도 진실의 소리는 시간을 넘어 퍼지고 있습니다. 세르반테스보다 그 진실의 섬광을 먼저 보여 준 조선의 석학이 있습니다. 세르반테스보다 50년 전에 살았고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당대를 비판했던 조식 선생(1501-1572)은 “사람들은 정직한 선비를 사랑하고 호피를 사랑하는데 이는 비슷하다. 살아있을 때는 그들을 죽이려하고 그들이 죽고 나면 아름답다고 한다.(人之愛正士好虎皮相似, 生前慾殺之死後方稱美)”고 했습니다.

섬뜩한 진실의 소리 아닌가요? 400년이 지난 지금 '맨 오브 라만차'를 보던 관객들 마음속에도 이 진실의 북소리는 울렸을 것이고 비록 침묵으로 지켜봤지만 현실이 강한 것처럼 진실도 강하다는 것을 현명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뮤지컬은 죽음을 앞에 둔 돈키호테에게 알돈자가 홀연히 나타나서 이렇게 외치는 걸로 끝납니다. “일어나세요. 돈키호테. 당신은 나를 둘시네아라고 불렀잖아요.”
검은 돈키호테, 오바마의 행보를 지켜볼 일입니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베스트 클릭

  1. 1 '외동딸 또래' 금나나와 결혼한 30살 연상 재벌은?
  2. 2 '눈물의 여왕' 김지원 첫 팬미팅, 400명 규모?…"주제 파악 좀"
  3. 3 의정부 하수관서 발견된 '알몸 시신'…응급실서 실종된 남성이었다
  4. 4 "나이키·아디다스 말고…" 펀러닝족 늘자 매출 대박 난 브랜드
  5. 5 BTS 키운 방시혁, 결국 '게임'에 손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