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준화 고집하다 양질의 교육기회 다 놓친다

머니투데이 최중혁 기자 | 2008.06.04 09:38

'하나고, 임직원 자녀 특례입학' 논란..."소탐대실 없어야" 지적

최근 한 지인으로부터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이민 2세대인 그는 브루나이에서 유년과 학창시절을 보내 한국말은 어눌한 반면 영어는 유창하다. 덕분에 서울서 대학을 졸업한 뒤 10년 넘게 영어 개인과외를 업으로 삼고 있다. 새 정부의 '아륀지(Orange)' 영어정책으로 형편이 좀 폈겠다고 농을 건네니 뜻밖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은 부자들이 영어를 독점하고 있다."

얘기인 즉슨 이랬다. 이른바 '강부자' 학부모들은 지금과 같은 기형적인 영어교육 시스템을 별로 싫어하지 않는단다. 학교에서 10년 넘게 영어를 배워도 간단한 회화조차 못하는 현실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개인과외나 영어연수 등 '돈의 힘'으로 극복 가능하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부실한 학교교육 덕택에 내 아이의 경쟁자들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어 내심 좋아하는 학부모들도 많다고 한다. 질 낮은 학교교육이 서민들의 '강부자' 진입을 막는, 훌륭한 '진입장벽' 역할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강부자'가 아닌 서민 학부모들이라고 했다. 조금만 아이디어를 내면 다같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이런 열악한 상황을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단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다같이 배고픈 건 참아도 남만 잘 돼 배 아픈 건 못 참는 면이 있다'고 말해 주니 "그렇다면 영어를 독점하려는 기득권자들에게 교묘히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평준화라는 환상의 덫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럴싸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영어 사교육 시장에서 십 수년째 잔뼈가 굵은 그만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사회의 이해하기 힘든 한 단면을 잘 짚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기여입학제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발단은 하나금융지주가 제공했다. 서울시의 은평뉴타운 자립형사립고 공모에 단독으로 응모, 지난 3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하나금융은 이 학교(일명 하나고) 정원의 20%를 차지하는 특별전형 대상에 사회공헌 자녀, 군인 자녀, 다문화 가정 자녀 등과 함께 하나금융 임직원 자녀도 포함시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즉각 반대 여론이 형성됐다. 특별전형이 특정 기업 임직원 자녀에게만 혜택을 주는 '기여입학제'로 변질됐다는 이유에서다. 인터넷에는 '재벌 구성원만 편하게 일류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부자들의 교육기회 독식'이라는 요지의 기사가 가득하다.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과 이명박 대통령이 고려대 동창이란 점을 들어 정치적 특혜 의혹이 제기됐고, 심지어 하나금융 불매운동 조짐까지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비판적 지지' 입장을 견지해 온 교총도 이 사안에 대해서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김동석 교총 대변인은 "임직원 자녀에 대한 장학금 혜택은 몰라도 입학까지 허용하는 것은 자사고 설립 취지와 맞지 않다"며 "특별전형은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실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미 부자들의 양질의 교육기회 독식이 상당히 심화된 상황에서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평준화 정책을 지키느라 양질의 교육기회 공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시키는 것은 전형적인 '소탐대실'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현주 하나금융 상무는 "기업의 자사고 설립에 대해 사적 이익추구보다는 사회환원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면서 "다만 주식회사가 이익이 나지 않는 사업에 수십년간 거금을 쏟아 부으려 할 때에는 주주들과 임직원들을 설득시킬 만한 약간의 인센티브 제공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 상무는 "포항제철고와 광양제철고의 경우 이미 정원의 60~70%를 임직원 자녀로 선발하고 있다"며 "다만 설립 지역과 취지 등이 좀 다르기 때문에 정원의 일정 수준 정도로만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또한 "지난 세월 평준화 정책을 미련스럽게 고집하다 사교육비 급증, 조기유학 급증, 기러기아빠 양산, 지역 교육격차 심화 등등의 수없이 많은 교육문제가 발생했다"며 "이제는 평준화의 허상에서 깨어나 양질의 교육환경 조성을 위한 기업의 교육투자 확대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다만 기업들이 너도나도 자사고를 임직원 복지수단으로 삼을 경우 교육기회의 불평등, 귀족학교로 변질 등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안전장치를 잘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이돈희 전 민족사관고 교장은 "분명히 교육서비스의 질이 높아지고 좋은 교육프로그램도 많이 개발될 것"이라며 "그러나 이같은 흐름이 기업들 간에 경쟁적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이 과연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예단하기 어렵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어떤 성격의 학교이냐가 매우 중요한데 만일 일류대 진학 중심의 영재교육이 설립 이념으로 자리잡을 경우 고교서열화나 학벌문화 등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고 "입학에 있어서도 선발에 혜택을 주는 것보다 선발 뒤 혜택을 주는 게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직은 기여입학 성격의 특례입학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평준화에 집착하다 다양한 양질의 교육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성도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개천에서 용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고려대 신입생의 21%가 특목고 출신이다. 대학들이 아직 관련 정보를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명문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대학들은 상황이 대동소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평준화에 홀린 서민들이 공교육이 서서히 망가져 가는 꼴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강부자'들은 조기유학이다 고액과외다 발빠르게 움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당장 하나금융이 자사고 설립 계획을 철회하게 되면 10%의 임직원 자녀 입학 기회가 날아가지만 10%의 사회공헌 자녀, 군인 자녀, 다문화 가정 자녀의 입학 기회도 함께 날아간다. 게다가 양질의 교육을 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80%의 일반전형 기회까지 사라지게 된다. '강부자'들은 이 기회가 사라져도 조기유학 등 상대적으로 대안이 많다. 소탐대실이라는 지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다.

다른 기업을 찾으면 되지 않냐고 쉽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복지사업에 해마다 수십억원씩 쏟아부을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은평뉴타운 자사고는 유찰 끝에 하나금융이 단독 입찰했고, 길음뉴타운은 아직 주인도 찾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자사고 그만 짓고 공교육 질을 높이는 게 해답이라고 한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5%도 되지 않는다. '쇠고기 집회'처럼 '교육예산 확보 집회'가 들불처럼 번져 교육예산이 대폭 늘어난다 해도 한 학교에 해마다 수십억원씩의 예산이 지원될 리는 만무하다. 국가가 민간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상무는 "조기유학 수요의 국내 흡수 등 정부가 하기 힘든 일을 기업이 대신하는 것이라면 유인책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다"며 "순수 사회복지사업 수준으로 자사고 투자를 유도한다면 한 두건은 투자가 있을지 몰라도 지속적인 투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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