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 자체였던 숭례문 상인들의 悲歌

류철호, 민경문, 전병남, 김경미 기자 | 2008.02.13 10:04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TV화면으로 봤던 참상과는 비교도 안됐다. 순간 "이 곳에 정녕 남대문이 있었든가"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화재가 난 지 3일이나 지났지만 화재현장 주변에는 여전히 시민들이 모여 들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화마가 할퀴고 간 잿더미를 바라봤다.

어떤 이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또 다른 이는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멍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이번 참화로 누구보다 가슴 아픈 이들은 바로 '숭례문'과 평생을 함께 해 온 주변 상인들이었다.

◆부모가 죽은 심정

"부모를 잃은 심정입니다" 숭례문 앞에서 13년간 구둣방을 운영해 온 설윤석씨(53)는 차마 뒷말을 잊지 못했다.

"사람들이 우리 가게 위치를 물어보면 항상 '남대문 앞'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다 알죠. 비록 두 평도 안 되는 구둣방이지만 그럴 때마다 뿌듯했는데"

설씨는 화재 당일 외지에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부모님 가시는 길을 지키지 못한 자식의 마음이랄까요" 설씨는 숭례문을 잃은 맘을 그렇게 표현했다.

설씨는 "개방전에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개방 이후에는 노숙자들의 천국이 됐습니다. 개방을 했으면 관리라도 확실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설씨는 자신의 버팀목을 무참히 앗아간 화마보다는 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어떤 이(?)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한평생을 함께 했는데

남대문시장에서 2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정학진씨(62)는 숭례문과 30년 지기다.

부친의 뒤를 이어 문구도매업을 시작한 것이 어느덧 32년째를 맞고 있다.


숭례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아침저녁으로 정씨를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이자 동반자였고 희망찬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게 한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정씨를 반갑게 맞아줄 이가 없다.

"너무 안타깝죠. 한평생을 같이 해왔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정씨는 말을 끊자마자 등을 보이며 눈시울을 훔쳤다.

◆청춘의 꿈이 사라진 듯

숭례문 근처에서 20년 넘게 지물포를 운영하는 안영승씨(67)는 숭례문에 남다른 추억이 얽혀있다.

갓 스물을 넘기던 해, 안씨는 남대문시장과 인연을 맺었다. 20년 가까이 이 가게 저 가게를 떠돌며 허드렛일을 해 온 안씨.

남대문의 소문난 ‘터줏대감’으로 불리며 시장과 인생의 반을 함께해 온 그에게 숭례문은 젊은 시절의 꿈과 희망이 서려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7시 반 이었나, 그게 불나기 한 시간 전일 거예요. 그 때만 해도 남대문이 멀쩡하게 서 있었는데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집으로 돌아갔거든. 밤 새 그렇게 타 버릴 줄 누가 알았나. 아침에 뉴스를 보는데 가슴이 턱 내려앉는 거 같더라고"

안씨는 청춘을 함께 한 숭례문이 잿더미가 돼 버린 것이 믿기지 않는 듯 가슴을 쳐댔다.

늘 함께 있는 곳이라 제대로 된 사진 한 번 찍지 않았던 게 못내 아쉽다는 그는 숭례문이 예전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하루 빨리 복구돼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길 바랐다.

국보 1호라는 거창한 수식어보다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 언제나 보물로 남아있던 숭례문.

남대문 상인들에게 숭례문은 단순한 국보급 문화재가 아닌 삶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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