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작은? 자극적인 육체 VS 폭넓은 지적욕구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에디터 2024.09.13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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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무비] '사랑의 탐구'…육체와 정신을 오가며 탐구하는 '사랑의 명제들'

영화 '사랑의 탐구'. /사진제공=티캐스트영화 '사랑의 탐구'. /사진제공=티캐스트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 한 명인 발터 벤야민을 두고 아내 도라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과의 육체적 관계를 포기할지언정, 그의 강력한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지성적 매력은 육체적 욕망을 지배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40세 철학강사 소피아(마갈리 레핀 블롱도)는 다르다. 10년간 안정적인 지적 관계를 유지해 온 사실혼 남편인 자비에(프란시스 윌리엄 레옴)에게 부족한 짜릿함을 인테리어 시공업자 실뱅(피에르 이브 카르디날)으로부터 찾는다.



사랑의 욕망은 지(知)에서 시작해 체(體)로 끝날까, 체(體)로 시작해 지(知)로 끝날까. 이 묘연한 방정식에 답은 없다. 그래서 제목처럼 여전히 '탐구' 중이다.

소피아가 지적 욕망을 멈추고 육체의 향연에 빠진 것은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다. 지식을 체득하는 것처럼 단계적이고 오랫동안 공을 들이는 작업이 아니어서 더 '쉽게' 몰입한다. 머리가 아닌 몸과 심장으로 느끼는 사랑은 순간순간이 새롭고 감동적이며 이 감정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과 믿음이 교묘하게 공존한다.



실뱅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소피아는 이렇게 애써 자신을 정의하고 합리화한다. "10년이나 살았으니 다른 남자랑 사는 게 당연해. 나도 육체에 초연하면 좋을 것 같아. 사소한 데 신경 덜 쓰고."

그러나 육체에 초연하지 못한 소피아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듯 그렇게 이중생활을 이어간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소피아의 사랑 탐구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적 욕망으로 뭉친 사실혼 남친 벗어나기→잘생긴 스페인 남자와의 육체 탐닉→스페인 육체 남과의 이별→우여곡절 끝 재회→자신의 인생과 사랑 선택하기다. 육체와 정신을 오가는 5가지 사랑 탐구 과정에서 동원되는 철학적 수사들은 그 자체로 영화의 재미와 품격을 높인다.

영화 '사랑의 탐구'. /사진제공=티캐스트영화 '사랑의 탐구'. /사진제공=티캐스트
①10년간 이어온 지적 남친으로부터의 해방 논리=소피아는 플라톤을 인용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욕망이란 개념과 연결되고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것. 그러니 플라톤의 소위 '플라토닉 러브'(순수한 비 성적인 사랑)는 좌절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갖지 못한 걸 욕망하는 것이고, 이런 형태의 사랑은 육체관계를 배제한다. 또 사랑이 지속되길 원하면 서로를 소유해서도 안 된다. 결국 상대에게 더는 성적으로 끌리지 않고 상대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가 잦아들면 사랑도 죽는다고 플라톤의 말을 빌려 역설한다.


②사랑의 시작과 끝 '육체'=스페인 남자와의 육체관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소피아가 인용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다. 소피아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요리하고, 그는 수리하고. 섹스도 맨날 하고. 이런 인생이 너무 좋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의지를 사랑의 동력이라고 했다. 상대의 번식력을 인지할 때 사랑의 감정도 생겨난다고. 또 번식은 인생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고 따라서 사랑은 불멸의 체험이라고. 쇼펜하우어의 이 말 한마디가 그의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좌표를 알려준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을 육체적이라고 정의했어요. 고귀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성적인 본능의 표현이란 거죠. 모든 게 육체에서 비롯돼요."

③이별 후 변화 '욕망과 사랑은 별개'=소피아는 실뱅과의 말다툼으로 원하지 않던 결별의 시간을 갖게 되자,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뜬다. 이번엔 스피노자다. 그에 따르면 욕망과 사랑은 별개이기에 가치 부여 없이도 욕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관심 없는 사람과도 잘 수 있고, 그 욕망의 대상을 경멸할 수도 있다. 사랑 없는 욕망도 가능하기에, 소피아는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하고도 아무 의미 없이 원나잇 섹스를 하며 욕망을 채운다. 사랑을 결정하는 건 상대에게 부여하는 가치다. 헤어진 지적 남친인 자비에와 오랜만에 만나 서로 대화가 잘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도 둘은 잠자리를 갖는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소피아는 상대의 욕망을 수용하고 '상대에게 부여한 가치 없이' 욕망에만 집중한다.



④재회의 기쁨 '진정한 사랑은 비이성적'=다시 못 만날 줄 알았던 소피아는 실뱅의 전화를 받고 재회의 기쁨을 만끽한다. 이전에 주문한 개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부착하고 자신을 성적으로 마음껏 다루라고 말한 뒤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강조한다. 떨어져 있는 동안 깨닫고 체득한 감정의 요약분은 어떤 이성이나 논리도 이해시킬 수 없는, '느끼는 모든 것'일 뿐이었다.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가 말한 '진정한 사랑은 비이성적'이라는 문구와 상통하는 순간이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만이 사랑의 유일한 근거이며 질병처럼 갑자기 우리를 덮치는 것이라고. 소피아가 실뱅이 사준 야한 옷을 입어보고 "포르노 여배우 같다"는 말도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비이성의 굴레에서 얻은 사랑의 재정의론이다.

⑤사랑은 '굴복'이 아닌 '선택'=결혼반지를 받은 소피아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부담 갖지 말라"는 실뱅의 말에 "당연히 해야지, 결혼할거야."라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다만 "결혼을 원하거나 꿈꾼 적이 없었다"며 "하지만 당신이 원하면 나도 원한다"고 했다. 소피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잠시 기름을 넣기 위해 실뱅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된 자신의 속내를 한참 들여다본다. 마치 이렇게 묻는 듯하다. "나는 진짜 결혼이라는 걸 원하는 걸까. 상대방이 착하고 멋있어서, 또 (상대방이 결혼하기를) 원해서 나도 무작정 원한다고 한 걸까."
그 짧은 순간, 떨어져 있는 분리의 경험을 통해 소피아는 어떤 자아, 어떤 자유, 어떤 자립을 꿈꿨을까. 그리고 어떻게 결론을 내릴까.
소피아는 떠올렸을 것이다. 벨 훅스가 말한 사랑의 정의를. 훅스는 사랑은 감정이 아닌 행위라고 했다. 그래서 사랑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모니아 쇼크리 감독도 이 미국 작가의 관점을 투영한다. "사랑은 동사이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할 수 있다는 것, 우리의 행복이 상대방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개인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내 인생은 물론, '사랑의 탐구'를 만드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말이에요."

영화 '사랑의 탐구'. /사진제공=티캐스트영화 '사랑의 탐구'. /사진제공=티캐스트
자칫 영화 결말이 어떤 페미니스트의 세계관으로 해석될 여지도 없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랑은 어떤 결론도, 어떤 해석도, 어떤 유추도 탐구 과정에선 내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는 점이다.



이 사랑의 세계관에는 그래서 소피아 동생의 다자 연애주의를 포함해 동성애 등 사랑의 모든 관계들이 다채롭게 소통되고 조명받는다. 소피아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그의 사랑은 정반합의 끝없는 논쟁과 투쟁이 이룩한 산물이라는 점에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농밀한 섹스신을 자극적으로 보여주기보다 있을 법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가장 현실적인 감정과 행위 묘사에 더 치중한다. 연인들이 한 번씩 겪었을 법한 격렬한 베드신에 앞선 싸구려 언어들, 성욕을 부추기는 원색적인 말투들이 그렇게 가감없이 쏟아진다.

때론 육체적 아름다움이 갖는 비속한 정신 상태를 비꼬는 자비에의 품평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쟁이나 시골을 촌동네로, 무엇을 뭐시기로 표현하는 무식함에 극우와 인종차별까지 지닌 실뱅의 태도를 지적하는 '그녀의 일상적인 세계'는 앞뒤 안 맞는 이중잣대의 지적 허영을 꼬집는 모순의 사례처럼 쓰인다.



무엇보다 여러 사랑의 탐구에서 가장 처절하고 견디기 힘든 장면은 10년을 같이 살고 사랑을 확인하며 불행하지 않은 삶을 영위했더라도 절친을 선언한 연인 옆에 눕지 못하고 기어코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자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실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자비에의 간절한 바람도, 마음이 돌아선 연인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지적 우월은 때론 감정의 육체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진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육체적 쾌락인가? 지적 욕망인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물음에 대한 진짜 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자비에 어머니가 소피아 앞에서 치매에 걸린 남편을 향해 "난 이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하고 흐느끼는 그 장면만이 고독하게 사랑의 정의를 암시하는 듯했다. 18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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