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훈 변호사
다시 말해 이 법률이 공익적 목적을 가지고 돌보려 한 어떤 죽음의 양태는 가족과 친척이 돌보지 못하는 고독한 죽음들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 가족의 죽음과 장례를 치르면서 모든 죽음은 결국 고독사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단순하고 명징한 진실을 나는 선친의 장례과정에서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아직까지 죽음에 대한 나의 모순된 생각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유물론적 사고를 하는 동안엔 죽음 후 인간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어쩌면 영혼이 존재할 수도 있어서 다른 시공간으로 그 영혼이 이동할 수도 있겠다는 근거 없는 기대 역시 품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점이 바뀐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의 죽음은 막연한 누군가의 죽음이었다(그의 죽음). 중년의 나는 가족의 죽음을 맞이한다(당신의 죽음). 그리고 이어서 1인칭 시점인 나의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결국 죽음과 나의 거리가 바뀌는 것이고 이제 중년의 나이에 이른 우리는 더 많은 장례식장을 찾을 수밖에 없고 나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가 됐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 중년들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영원히 살 것처럼 여전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듯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노화에 대한 혐오 내지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철저한 무시와 짝을 이뤄 만연하다. 그리고 그 무시의 같은 편에 이른바 '영피프티'론이 말하는 영원히 소비하는 중년들이 좀비처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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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조하자면 한 생명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파스칼이 은유적으로 말했듯이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쇠사슬에 묶여 자신의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이다'(박이문 '죽음 앞의 삶, 삶 속의 인간'). 매일 아침 죽음을 생각하는 삶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겠지만 죽음을 전혀 떠올리지 않고 살아가는 삶 역시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생명을 향한 욕망과 필멸의 조건이 뒤섞여 있는 우리의 존재조건을 직시하고 하루, 한 달, 1년의 삶이 나의 죽음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너무 멀지 않게 떠올리는 것이 지금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그러한 깨달음들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보다 성숙한 태도를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지난 1일 서울시청앞 자동차 사고로 운명을 달리 하신 시민들의 명복과 남겨진 가족들의 평화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