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故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을 보내며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4.04.0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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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의 思見]

충남 태안군 모항항 백사장 인근에서 2008년 신년 시무식을 겸해 원유 유출 피해 복구를 위한 방제활동을 펼치고 있는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사진=머니투데이 DB 사진충남 태안군 모항항 백사장 인근에서 2008년 신년 시무식을 겸해 원유 유출 피해 복구를 위한 방제활동을 펼치고 있는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사진=머니투데이 DB 사진


지난달 29일 향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2일 영원의 길로 떠났다. 단신의 다부진 체격인 조 명예회장은 2010년 담낭암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그 누구보다도 한국 재계를 위해 열정적으로 살았던 경영자다.

기자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그의 모습은 2008년 전경련 시무식 때다. 보통 대강당에서 진행되는 시무식과는 달리 그는 영하의 찬바람이 가득한 태안 모항리 백사장 인근에서 시무식을 열었다. 당시 사회적 현안이었던 태안 기름유출 사고의 피해 복구를 위한 방제활동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조 명예회장은 당시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고무장갑을 낀 채 효성이 만든 첨단 부직포와 흡착포로 바위에 낀 기름 때 하나하나를 닦아냈다. 언론의 사진촬영용 포즈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기름을 닦는 그의 모습에선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진심이 묻어났다.



그의 옆자리에서 함께 돌과 바위의 기름을 닦아내며 한국 경제의 난제와 그 해법에 대해 기자가 질문을 던졌고, 조 회장은 2시간 이상 거침 없이 자신의 철학을 이어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노사가 협력해 시장을 키우고 이를 함께 나누자며,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동 노력을 경주하자고도 했다. 서로 상대의 것을 뺏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새로운 파이를 창출해 나누는 플러스 게임을 이야기했다. 그는 기자가 기사작성을 위해 자리를 떠나려하자 "기사는 무슨, 기름이나 더 닦으소!"라고 웃으며 그 자리에서 3시간 동안 쪼그려 앉아 기름을 더 닦아냈다.

그는 어떤 일이든 하면 빈틈없이 하는 단단한 차돌 같은 성품을 가진 작은 거인이었다. 재계의 맏형 역할에 힘을 쏟았던 그는 일평생 '기술 중심 주의'를 강조했던 공학도로서 효성의 글로벌 1위 제품인 스판덱스·타이어코드 등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2004년 5월25일 노무현 대통령과 경제활력 회복을 위한 대기업대표와의 대화에 앞서 정몽구 현대차 명예회장(오른쪽부터), 조양호 한진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 최태원 SK 회장, 이건희 삼성회장 등이 간담회장으로 입장하고 있다./사진제공= 효성그룹 제공2004년 5월25일 노무현 대통령과 경제활력 회복을 위한 대기업대표와의 대화에 앞서 정몽구 현대차 명예회장(오른쪽부터), 조양호 한진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 최태원 SK 회장, 이건희 삼성회장 등이 간담회장으로 입장하고 있다./사진제공= 효성그룹 제공
전경련 일을 할 때도 허투루 하는 일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세세하게 챙기다보니 전경련 직원들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그의 거침 없는 말과 행동은 그러다보니 오해도 적잖이 받기도 했다. 대통령은 경제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선거를 앞두고 특정 후보를 지지했다는 논란에 휩싸이며 정권에 밉보여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다.



2009년 그는 효성을 한단계 더 도약시킬 수 있는 기회가 반도체에 있다고 보고 하이닉스 인수에 총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 기업이라는 이유로 갖은 오해의 늪에 빠졌었다. 그는 특혜시비에 인수의향서 제출 2개월만에 인수를 포기했다. 이는 그의 일생에 가장 아쉬운 대목 중 하나다.

당시 조 회장은 아무도 인수하려고 하지 않았던 하이닉스에 유일하게 인수의향서를 제출하며 인수의지를 불태웠었다. 그는 두터운 반도체 관련 서류들을 직접 들고 퇴근할 정도로 반도체 인수에 열정을 보였었다. 비난 여론에 인수의향을 철회한 그 하이닉스는 3년 후 SK그룹이 인수해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하이닉스 인수좌절의 절망감 때문이었을까. 하이닉스 인수가 무산된 그 이듬해 조 회장은 담낭 암에 걸려 수술을 하고 7월엔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암으로 갑작스럽게 2010년 전경련 회장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더 길게 한국 재계의 수장으로서, 효성 그룹의 회장으로서 현장을 지킬 수 있었던 거목이었다.


조 명예회장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사업을 번창시켜라"는 마지막 유언을 후손들에게 남겼다고 한다. 이제는 그 유지를 이어받아 그의 아들들이 더 큰 효성을 만들어 국가와 국민에 봉사할 때다.

조 명예회장은 이제 마음 편히 하늘나라에서 먼저 가 기다리고 있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 고 구본무 LG 회장, 고 조양호 한진 회장 등 과거 전경련 부회장들과 만나서도 한국의 경제 발전을 기원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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