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발가벗고 수영한 스타트업과 VC

머니투데이 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 대표 2024.03.27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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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 대표 /사진=남미래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 대표 /사진=남미래


' '물이 빠지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워런 버핏이 2001년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서한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당시 닷컴버블이 터지면서 부실기업들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빗댄 표현이다. 좋은 시절에는 누구나 멋진 이야기를 하고 스스로를 포장할 수도 있지만 어려운 시기가 닥치면 그때야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현재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혹한기를 거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벤처투자 호황기는 이 생태계를 양적으로 팽창시켰고 많은 돈과 인력이 유입됐다. 전도유망한 스타트업들이 생겨났고 여기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VC) 역시 크게 성장했다. VC들이 앞다퉈 투자경쟁에 뛰어들면서 스타트업의 기업가치는 끝없이 치솟았다. 그 결과 많은 유니콘이 탄생했다.



스타트업이라면 돈을 연료로 불태워가며 성장하는 것이 당연했고 VC는 이런 스타트업에 끝없이 연료를 제공할 것 같았다. 손익분기를 맞추는 것은 스타트업답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야말로 '돈'이 가장 흔하고도 저렴한 재화였다.

하지만 그런 호시절이 갑자기 끝났다. 그야말로 '수영장의 물이 빠져버린' 것이다. LP들이 지갑을 닫자 VC들도 지갑을 닫았다. 지난 투자유치 때보다 기업가치를 낮추는 소위 '다운라운드'에서도 투자를 받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부지기수로 늘었다.



이제는 VC는 손익분기를 맞춰가는 스타트업을 찾기 시작했다. 돈을 불태워야만 성장할 수 있는 스타트업은 '밑 빠진 독' 취급을 받게 됐다. 가장 흔한 재화였던 '돈'은 가장 희귀한 재화가 돼버렸다. 이제는 '유니콘' 대신 '낙타'가 주목받는다고 한다.

이런 스타트업 혹한기는 2022년부터 시작됐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결과는 최근 들어서야 생겨나기 시작한 것 같다. 폐업하는 스타트업이 속출하고 심지어 문을 닫는 VC도 나온다. 누가 수영복을 입지 않고 있었는지 드러나는 것이다. 특히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서 그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자신만만하던 스타트업 대표 중 회사가 어려워지면 갑자기 연락이 잘 안 되거나 잠적하는 경우도 있다. VC마다 이런 골치 아픈 피투자사가 한두 군데는 꼭 있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표자로서 책임을 끝까지 다하는 분도 있다. 주변의 한 대표님은 회사가 폐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과 의사결정을 투명하게 주주들과 공유하고 남은 자산을 매각해 주주들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또 어떤 대표님은 경영난으로 결국 직원 전원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퇴사한 후에도 (심지어 새 직장을 구한 후에도) 퇴근 이후와 주말에 모여 회사를 회생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를 보면 누가 수영복을 입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VC도 마찬가지다. 모든 VC는 자신이 창업자 친화적이며 최선을 다해 피투자사를 돕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혹한기가 닥치자 어려움에 처한 피투자사를 외면하거나 오히려 대표자에게 무리한 요구, 혹은 강요하는 곳들이 나온다. 지면에 모두 옮기기는 어렵지만 주변에서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는다. VC가 출자자에 대해 가지는 소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에 그치지 않고 '악독한' 관리자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역시나 누가 수영복을 입지 않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좋은 시절에는 누구나 멋있는 이야기와 그럴듯한 약속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누군가는 혼자 살아남으려고 도망치고 누군가는 끝까지 책임지려고 한다. 누군가는 끝내 약속을 지키려 하고 누군가는 그동안의 약속이 모두 공수표였음이 들통 난다. 이제는 수영장의 물이 모두 빠지고 있다. 언젠가 수영장의 물은 다시 차오르겠지만 그때는 당신이 정말 수영복을 입고 있었는지 모두가 알고 난 이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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