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쏴 죽인 내가 죄인인가"…끝까지 당당했던 '영웅' 안중근[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박상혁 기자 2024.03.26 05:40
글자크기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일본 헌정 기념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탄환. 이토 히로부미는 이 탄환을 맞고 하얼빈역에서 사망한다./사진=KBS1 천상의 컬렉션일본 헌정 기념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탄환. 이토 히로부미는 이 탄환을 맞고 하얼빈역에서 사망한다./사진=KBS1 천상의 컬렉션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뜻 이루도록 하늘이시여, 지켜주소서"

-뮤지컬 '영웅' 대사 중 일부-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은 거사를 앞두고 중국(당시 청나라) 하얼빈역에서 권총을 주머니에 쥔 채 조용히 기도했다.



목표는 제1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작전은 하얼빈역에 내릴 그를 향해 사격 후 사살하기. 권총에 장전된 총알 7발엔 모두 십자가 형태로 금이 그어져 있었다.

퇴로가 없는, 그래서 목숨을 건 작전. 거사를 앞둔 그는 초조하게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이 작전을 통해 그는 대체 뭘 이루고 싶었던 것일까.



이토가 탄 기차는 서서히 하얼빈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권총 세 발에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은 "코리아 우라(만세)" 외쳐
10월26일 오전9시30분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권총 3발을 사격한다./사진제공=국가기록원10월26일 오전9시30분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권총 3발을 사격한다./사진제공=국가기록원
"탕 탕 탕"... 1909년 10월26일 오전, 환영 인파 속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안중근이 쏜 권총 3발은 정확히 이토 히로부미의 몸에 박혔다. 총에 맞고 쓰러진 사람이 이토인지 확신하지 못한 그는 주변에 있던 관계자들을 향해서도 사격했다.

총상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는 기차 안으로 피신했지만 30분 만에 사망했다. 그와 동행하던 가와카미 도시히코 일본 총영사, 모리 야스지로 수행비서, 다나카 세이지로 만주 철도 이사 등 3명은 부상을 입었다.

안중근은 사격 후 큰 소리로 "코리아 우라(Koea ura)"를 세 번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코리아 우라'는 러시아어로 '대한민국 만세'라는 뜻이다.

현장에서 붙잡힌 안중근은 저항하지 않고 포승줄에 묶인 채 순순히 따랐다. 그는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진 후 약 900㎞를 이동해 일본이 관할하는 뤼순 감옥으로 이감된다.

사건이 발생한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 조계지였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재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외교적 마찰을 두려워한 러시아는 일본 측 요구에 재판권을 넘긴다.

당시 뤼순은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안중근을 이곳에 수감해야만 일본인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사를 두고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의 첫 공개재판…당당한 모습에 일본 재판부 '당황'
뤼순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 왼쪽부터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 안중근./사진제공=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뤼순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 왼쪽부터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 안중근./사진제공=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건이 발생한 후 약 4개월이 지난 1910년 2월7일. 안중근의 첫 공개 재판이 열렸다. 이날 방청객에는 '조선인 테러리스트' 안중근을 보기 위해 500명 이상의 인파가 몰린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안중근의 '악랄함(?)'을 공개하려던 일본 재판부는 막상 재판이 시작하자 적잖이 당황했다. 그의 태도는 당당했으며 되레 일본 제국의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등 거침없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급하게 비공개 재판으로 바꾸고 방청객들을 퇴실 조치했다.

일본 재판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나"

안중근: "나는 한국 의병의 참모 중장으로서 독립전쟁에 참여해 이토를 죽였고 참모 중장으로 계획한 것인데 이 법원 공판장에서 심문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등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도 조목조목 밝혔다.

특히 안중근은 12번째 이유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를 강조했다. 그는 조선, 일본, 청나라가 서로의 주권을 존중하고 협력해 외세의 침략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이 이를 어기고 조선을 침략하는 바람에 동양의 평화가 깨졌다고 말했다.

첫 공판이 열린 지 1주일 만인 1910년 2월14일. 일본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애당초 사형 선고라는 결론은 미리 정해져 있었다. 재판 과정은 형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안중근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고 항변했다.

일본 재판부는 안중근의 항변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 조마리아의 '마지막 편지'… 그리고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는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사진=KBS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는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사진=KBS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 얼마 후.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에게 편지 한 장이 도착한다. 편지에는 아들에게 항소하지 말 것과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어머니의 말이 담겨 있었다.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은 일본 재판부에 사형 선고에 항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동양 평화론'을 집필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재판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중 하나로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로 규정한 만큼 죽기 전 동북아가 나아가야 할 식견과 미래 구상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 간 △국제기구를 통한 다국적 협력 △경제통합 △집단안보 등 구상을 제시했다. UN(유엔)이나 EU(유럽연합) 같은 국제기구가 탄생하기 수년 전 이미 안중근은 선진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미완성된 상태로 남았다. 안중근을 오래 살려둘수록 조선 내 항일 여론과 세계적 동정 여론이 고조될 것을 우려한 일본이 사형을 앞당긴 것이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죄드립니다"…사형 앞둔 안중근에게 고백한 교도관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일본인 교도관에게 준 유목 선물. '위국헌신 군인본분'./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일본인 교도관에게 준 유목 선물. '위국헌신 군인본분'./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40여일 만인 1910년 3월26일. 안중근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수의를 입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중근이 수감된 이후 그를 전담 감시해 온 일본인 교도관 지바 도시치는 사형을 앞둔 그를 보며 괴로워했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안중근을 감시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안중근에게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사죄드리고 싶은 심정이오"라고 털어놓았다.

안중근은 그를 급하게 불러 작별 인사를 한 뒤 마지막 선물로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이란 유목을 써 준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사형 집행 장소로 간 안중근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는 일본인 형무소장의 물음에 "내가 한 일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협력해 동양 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길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전 10시. 안중근은 교수형으로 사망한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자신의 시신을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서울시 용산구의 효창공원엔 안중근의 묘엔 시신이 없는 가묘 상태로 남아 있다.

생전에 그토록 바라던 동양 평화… 그의 기도는 과연 이뤄졌을까?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에 위치한 안중근 가묘/사진제공=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에 위치한 안중근 가묘/사진제공=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
동양 평화의 꿈을 가진 안중근이 사망한 지 35년이 지난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며 그가 그토록 바랐던 한국의 주권 회복이 이뤄졌다. 이후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양국 간 끊겼던 교류도 재개됐다.

2002년엔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하는 등 문화·체육 부문에서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2022년 한일 교역 규모는 853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일본은 한국의 4위 교역대상국이 됐고 특히 제조·서비스업 부문에서 일본의 한국 투자 규모는 2023년 기준 전년 대비 26.3% 증가했다.

2008년부터는 한국·중국·일본 3국이 정상회담을 하는 '한·중·일 3자 정상회담'도 연례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다음에 열릴 9차 정상회담은 우리나라 서울에서 열린다.

물론 정권에 따라 양국, 혹은 3국 간의 관계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안중근이 염원했던 양국 간의 교류와 협력, 더 나아가 한·중·일 3국 간의 협력, 경제교류, 주권 존중의 정신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지켜지게 됐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