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쓴 시진핑의 새 역사교과서…"두 번째 결합" 의미는

머니투데이 베이징(중국)=우경희 특파원 2024.03.1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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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16국 표기 '치욕의 시간'→'민족 섞이는 과정',
'하나의 중국' 철학 아래 역사·민족 대통합 밑그림…
다양성 인정 않는 극단 역사관, 소수민족 반발 우려

2024년 3월 4일 양회 개막 행사 격인 첫 정협 전체회의를 마친 인민 대표들이 인민대회당을 빠져나오고 있다. 일부 소수민족과 각종 종교계 대표들이 복장을 통해 확연히 구분된다./사진=우경희 기자 2024년 3월 4일 양회 개막 행사 격인 첫 정협 전체회의를 마친 인민 대표들이 인민대회당을 빠져나오고 있다. 일부 소수민족과 각종 종교계 대표들이 복장을 통해 확연히 구분된다./사진=우경희 기자




"중국의 새 역사교과서는 이전 교과서에서 '치욕의 시간'으로 표현되던 5호16국 시대에 대해 '민족이 섞이는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국사 해석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 동부지역 대학 한 인류학 교수가 18일 홍콩 SCMP(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를 통해 한 말은, 지난 2월 편찬돼 곧 중국 대부분 대학에서 필수 교재로 채택될 예정인 '중화민족 공동체 입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중국의 모든 역사는 통합의 과정이며 중국 내 모든 민족은 중화(中華)의 개념 아래 하나로 뭉뚱그려져야 한다는게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장이다.



이런 철학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 2014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이라는 용어를 공식 언급한 이래 10년에 걸쳐 중국의 대표적 민족통합 주장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꼼꼼히 논리를 엮었다. 종래엔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구분을 없애고 하나의 중화민족만 남기겠다는 의도다. 역사를 새로 쓰는 과정에서 주변 국가들과 갈등이 고조될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새 책은 시진핑 사상정치 필수 교재...두 번째 결합 이론 반영됐다"
위·촉·오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의 진나라는 사마씨 군왕 8명이 벌인 8왕의 난으로 망한다. 흉노 등 5개 이민족은 이 혼란을 틈타 옛 위·촉 땅 대부분을 차지했다. 5호16국 시대다. 한족이 다시 통일왕조(송)를 세우기까지는 600여년이 걸렸다. 중국은 송에 앞서 건국된 수·당은 한족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도, 5호16국 시대만큼은 그간 역사교재에 '암흑의 기간', 내지는 '발전을 역행한 기간'으로 표현했었다.



그러나 새 역사교과서 '중화민족 공동체 입문'은 5호16국 시대를 "중화민족이 섞이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이민족의 역사도 중화의 역사라는 거다. 이 대목은 책의 편집대표인 판위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국장이 수정을 직접 주도했다. '민족 통합'을 최우선에 두고 역사를 아예 새로 해석했다는 의미다.

중국 관영 인민망은 책에 대해 "'시진핑 사상 정치'의 필수교양 교재"라며 "중화민족 역사관을 중심으로 동고동락하며 영욕과 생사를 같이 하는 운명 공동체 이념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두 번째 결합'의 중대한 이론 혁신이 반영됐다"고 강조했다. 신중국 탄생이라는 첫 번째 결합에 이어 55개 소수민족을 녹여 흡수하는 두 번째 결합에 대한 시도다.

(베이징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4일 (현지시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 인민 정치 협상회의(정협) 개막식에 참석한 뒤 떠나고 있다. 2024. 3. 5  /AFPBBNews=뉴스1(베이징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4일 (현지시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 인민 정치 협상회의(정협) 개막식에 참석한 뒤 떠나고 있다. 2024. 3. 5 /AFPBBNews=뉴스1

당연히 중국의 과거 소수민족 정책은 완전히 부정한다. 과거 정책이 "편협한 민족의식과 소수민족 예외주의를 조장했다"고 지적했다. 사례는 해외서도 찾았다. 2021년 트럼프 지지자들이 벌인 미국 국회의사당 공격 사건을 '중산층 백인들이 빈부격차를 유색인종 탓으로 돌린 대표적 사례'라고 비판했고 유럽·인도·아프리카 등의 소수민족 공존 정책은 "국가 정체성의 딜레마를 불러왔다"고 몰아세웠다.

'한민족의 중국'은 극단적 역사관이지만 중국 주류사회에선 그대로 받아들여질 전망이다. 시진핑 3기 권력집중이 극도로 강화된 가운데 젊은 층의 국가주의적 성향은 최고조다. 반대 여론이 있다 해도 찬성론자들의 파상 공격 속에 목소리도 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계 전문가들도 일제히 긍정적 평가로 지원사격 중이다. 라이홍이 노팅엄대 부교수(사회학)는 "이 책은 중국 민족의 진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폭넓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했다. 마하이윈 프로스트버그주립대 부교수(역사학)는 "한족이라는 개념을 좁게 정의하는 정책은 화합보다는 긴장을 조성할 뿐"이라고 했다.

소수민족 정책, 공존에서 통합으로...반발 우려

새로운 역사관은 새로운 정책으로 연결된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이 '존중'에서 '통합'으로 180도 달라진다는 뜻이다. 중국엔 55개 소수민족이 있다. 전체 인구로 따지면 한족이 90~91%로 절대다수지만 소수민족도 1억2500만여명이나 된다. 이들이 자치구 등 기존 터전에서 저마다 나름의 문화와 역사를 인정받으며 존속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강제적 흡수가 뒤따를 가능성이 높다.

소수민족 융화 정책 자체가 처음은 아니다. 그간 시나브로 진행돼 왔다. 인구 2000만명으로 최대 소수민족인 좡족(壯族)은 거의 한족화가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을 받는다. 1000만명에 달하는 만주족(滿族) 역시 청나라 시대를 거치며 한족과 사실상 동화했다. 중국화 무슬림인 후이족(回族) 980만명 등도 융화 성공 사례다.

문제는 다 그렇진 않다는 거다. 중국 서북면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약 830만명이 모여사는 위구르족(維吾爾族)은 후이족과 달리 독립 성향이 매우 강한 튀르크계 무슬림이다. 중국 정부와 갈등이 빈번해 중국의 화약고라고 불린다. 네이멍구에 580만명 정도 모여사는 몽골족(蒙古族)도 역사적으로 한족과 사이가 좋지 않다. 540여만명이 시짱자치구에 거주하는 티베트족(藏族)도 독립운동 중이다.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위구르족 악사들./사진=바이두 캡쳐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위구르족 악사들./사진=바이두 캡쳐
중국 정부의 민족융합 정책은 결국 이들 소수민족에 대한 적극적이고 강제적인 통합정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통합과 획일화는 양안(중국과 대만) 통일을 국시로 삼고 있는 시진핑 행정부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명분이다. 1인 권력집중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시 주석의 입장에서 역사교육을 통한 인민들의 의식 통일은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 여파로 소수민족들은 독자적 역사와 문화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 문제뿐 아니다. 그간 소수민족에 제공됐던 한 자녀 정책 면제, 입시 특혜, 주택구입 지원 혜택이 사라진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크다. 중국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소수민족은 물론 조선족 등 그간 중국 친화적이었던 소수민족들이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

새 역사관을 내놓은 중국 정부가 어떻게 소수민족의 반발을 잠재우며 통합을 추진할지가 관심사다. 이와 함께 과거 동북 3성(헤이룽장·지린·랴오닝)의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이른바 '동북공정'으로 주변 국가들과 마찰을 빚었던 중국이 소수민족 역사 흡수 과정에서 재차 국제적 갈등의 중심이 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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