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21조 배상해" 美법원 판결에 남미 산유국들 발끈한 이유

머니투데이 김종훈 기자 2024.03.0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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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석유기업 YPF 국유화했다가 미국 법원서 손해배상 판결…브라질 등 인근 산유국 "주권침해" 반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지난 1일(현지시간) 자국 의회에서 연설 중이다./AFPBBNews=뉴스1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지난 1일(현지시간) 자국 의회에서 연설 중이다./AFPBBNews=뉴스1


아르헨티나가 현지 석유기업을 강제로 국유화한 것은 잘못이라며 미국 법원이 160억 달러(21조6700억원) 배상을 명령한 데 대해 브라질 등 인근 산유국들이 항의에 나섰다. 아르헨티나 판결로 자국의 '석유 통제'에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해 먼저 행동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브라질·우루과이 "미국 판사 판결 때문에 아르헨 국민이 부담?"
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즈(FT) 보도에 따르면 중남미 주요 산유국 중 하나인 브라질은 우루과이와 함께 미국 제2순회항소법원에 최근 제출한 서면에서 "(아르헨티나 배상금 사건에 대한) 지방법원 판결은 외국 주권과 사법권 존중 원칙을 침해했다"며 "이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9월 뉴욕 맨해튼지방법원에서 YPF 옛 주주들에게 160억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고 항소했다. 이에 제2순회항소법원이 사건을 넘겨받아 심리 중이다.

브라질은 "애초에 (미국 지방법원에) 관할권이 없는 사건"이라며 "통치권에 관한 법률을 잘못 해석한 판사의 판결 때문에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경제적 결과를 떠안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석유기업 YPF 본사 전경./AFPBBNews=뉴스1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석유기업 YPF 본사 전경./AFPBBNews=뉴스1
아르헨티나 160억 달러 배상 사건은 2012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현지 석유기업 YPF를 국유화한 것에서 시작됐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석유기업 렙솔이 소유하고 있던 YPF 지분 51%를 강제 매수한 뒤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때 함께 소수 지분을 빼앗긴 미국 펀드사 이튼 파크 캐피털은 영국 소송금융기업 뷰포드캐피털과 손잡고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아르헨티나의 강제 국유화는 주주권리 침해라는 주장이었다.

뷰포드캐피털은 2015년 다른 YPF 소액주주들로부터 권리행사청구권을 넘겨받아 10년 가까이 소송을 주도했고, 지난해 9월 맨해튼지방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사건을 맡은 로레타 프레스카 판사는 손해배상금 원금 84억 달러에 2012년부터 계산한 지연이자 76억 달러를 더해 총 배상금을 160억 달러로 산정했다.

미국 법원이 아르헨티나 정부의 국유화 결정에 대해 판결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YPF 주식이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됐고, 국유화를 위한 지분 이전도 뉴욕 증시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뉴욕 법원에 관할권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프레스카 판사는 지급 기한을 지난 1월10일로 설정하고 아르헨티나가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자산 압류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아르헨티나는 국가경제 상황이 여의치 않다며 판결 집행을 미뤄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가 기한 내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면서 압류를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 자산 목록과 소재를 밝혀내는 것이 관건인 상황이다.

아르헨 대통령 "우린 돈 없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지난 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의회에서 연설 중이다./로이터=뉴스1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지난 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의회에서 연설 중이다./로이터=뉴스1
FT에 따르면 160억 달러는 아르헨티나 올해 예산의 45%에 이르는 액수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방송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런 돈이 없지만 지불할 의사는 있다"며 만기 없는 국채 발행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2012년 YPF 국유화를 주도했던 악셀 키실로프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지사의 이름을 딴 '키실로프세'를 신설해 세금으로 채권 이자를 지급하겠다는 것. 부에노스아이레스타임즈는 세계적으로 고금리 기조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밀레이 대통령이 현재 금리 수준으로 영구채를 발행한다면 도리어 막대한 재정 부담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미에 부는 '석유 민족주의' 바람
남미 국가들은 이번 아르헨티나 판결 여파가 자국까지 미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돈줄인 석유를 통제하려다 아르헨티나처럼 막대한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서가 날아들 수 있다는 것.

블룸버그에 따르면 최근 브라질 룰라 행정부는 자국 내 석유기업들에게 수출세를 부과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석유기업들이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4개월간 수출 매출의 9.2%를 세금으로 납부하라고 통보했다. 블룸버그는 "브라질의 자원 민족주의를 더욱 고조시키는 조치"라고 했다.

쉘, 토탈에너지, 렙솔 등 다국적 석유기업들은 룰라 행정부가 업계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세금을 부과했다며 현지 법원을 통해 불복 절차를 밟고 있다.

에콰도르는 2009년 프랑스 석유업체 파렌코가 운영하던 시추현장을 강제 국유화했다는 이유로 파렌코에 3억7400만 달러를, 미국 화석연료기업 코노코필립스 측에 3억3700만 달러를 배상한 바 있다. 코노코필립스는 자회사를 통해 파렌코 시추현장에 지분을 가진 투자자였다. 에콰도르 측은 파렌코를 비롯한 운영주체들이 시추현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직접 나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세계은행으로부터 배상 명령을 받고 업체들과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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