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서 '희망'을 외치다: 시인이 '풀'에서 보는 미래 [PADO]

머니투데이 조희정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2024.02.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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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리브스의 시집 'Best Barbarian' 표지. /사진제공=WW Norton & Company로저 리브스의 시집 'Best Barbarian' 표지. /사진제공=WW Norton & Company


종말에 대해 말하는 문학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의 작가로 잘 알려진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200여 년 전에 내놓았던 <최후의 인간>(The Last Man)에서 세상은 전염병의 창궐로 멸망한다. 그 이후로 수많은 계시 문학(apocalyptic literature), 그리고 SF 영화들은 세상의 끝을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해 왔다. 외계 생물체들의 공격이나 다른 행성과의 충돌, 홍수나 이상고온과 같은 기후 변화, 핵이나 화학 물질을 사용한 전쟁, 인간이 고안해 낸 사이보그들의 역습, 종교적인 심판의 도래 등 현재를 구성하는 세계 질서를 위협하고 끝장낼 수 있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세상의 끝을 상상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현재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 문제가 어디에서 폭발적으로 우리를 위협할 것인지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재가 불안정하면 불안정할수록, 종말에 대한 상상력은 더욱 구체화되고 명료해진다. 과거 미국과 소비에트 연합을 두 축으로 하는 양극 체제가 분명했을 때 종말 문학이 여러 형태로 나타났던 것처럼, 지구 환경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세계 곳곳에서 국지전의 위협이 현실이 된 요즈음 세상의 끝에 대한 문학적 상상이 촉발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2023년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 최종 후보 중 하나였던 시인 로저 리브스(Roger Reeves)는 '아이들아 들어봐'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과연 어떤 희망이 가능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로저 리브스 - 아이들아 들어봐 (번역: 조희정)
그렇지만 내가 세상의 종말에 대해
깊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걸로 밝혀졌어
화염에 싸인 몸은 화염에 싸인 몸이 아니라
그저 집에 난 화재를 신경 쓰지 않은 거야
저 외롭게 타오르는 배의 검은 돛이
연인들의 다리를 따라 비비면서
회전목마에 의해 로마의 하늘로 던져지고
그 연인들은 너무나 아프도록 사랑에 빠진 나머지
현관에서 불에 휩싸인 남성이나
개로 잘못 본 불타는 아이를 주목할 수가 없어
폭탄에 대해 말하려고 뛰어와서는
들어오기 전에 문을 두드리지 않았던 아이로 잘못 보는 거지
가자 지구에서 풍성한 즐거움의 기쁜 소식을 안고서
카지미에르즈에서 신은 울고 있어
창문 안에서 금으로 된 손 하나가 머리 위로
올려져 있지 마치 미래의 번드르르한
누더기에서 미끄러진 것처럼 우리 인간의
친절함이란 특별할 게 없어 파리가
다리를 모아 비비는 거 같은 거지 칸탈루프
조각에 서서 말이야 아이들아
너희들은 결코 인간이 될 게 아니었어
너희들은 풀이어야만 해
너희들은 무덤 위로 거칠게 자라나야만 해



리브스가 이 시에서 그려내는 현실은 전쟁의 화염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 세상을 끝장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다른 문학 작품에서도 흔히 등장하지만, 이 시의 독특한 점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불이 이미 우리 바로 곁에서 세차게 타오르고 있다고 강력하게 말하는 데 있다. "종말"에 대해 상상하면서 언젠가 먼 훗날에 "화염에 싸인 몸"을 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불은 이미 우리의 "집"에서 시작됐으며, 다만 우리는 그 불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방치된 화재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되면서 크나큰 화염으로 번져 나갔다. 자기 집 "현관에서 불에 휩싸인 남성"조차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류는 어디선가 벌어지는 무력 충돌에 대해 그저 무감했을 뿐이었다. 지금 가자(Gaza)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촉발되기 이전에도 "불타는 아이"와 같이 두려운 미래를 알리는 조짐들이 여기저기에 나타났지만, 사람들은 마치 "개"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처럼 그 조짐들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인류사에서 이런 일들은 결코 처음이 아니다. 카지미에르즈(Kazimierz)에 대한 시인의 언급은 2차 대전 당시에 폴란드의 크라쿠프 지역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학살의 끔찍한 기억을 소환한다. "신"조차 무력하게 울고 있는 잔혹한 인류사의 흐름에서 구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외롭게 타오르는 배의 돛"이 "로마의 하늘"로 던져진다는 표현은 되풀이되는 전쟁과 야만의 소용돌이가 서구 문명의 기원을 형성하는 고대 로마 시대로부터 줄곧 계속되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인간들의 역사가 이렇게 절망스러운 종말적 사건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연인들"의 사랑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역설적으로, 서로에게 열중한 나머지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의 조짐에 아무 관심이 없는 이 연인들은 이런 배타적인 몰입의 결과로 희망을 생산해 낸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아이들"을 낳으며, 이 아이들은 어떤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계속 끝나 가지만 문학은 여전히 "아이들"을 통해 꿈을 꾼다. 시인이 '아이들아 들어봐'라는 제목으로 이 시를 쓴 것 역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꿈 꾸기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다.

리브스가 이 시에서 미래의 희망을 매개하는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인간"이 아닌 "풀", 그것도 "무덤 위로 거칠게 자라나는" 풀이 되라는 것이다. 인류가 이제까지 만들어 온 역사는 "인간"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주변을 파괴하는 참담한 사건들의 반복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들이 베푸는 친절이며 환대란 "칸탈루프" 위에 서 있는 "파리"가 앞다리를 비비는 것처럼 한없이 하찮고 위선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아이들에게 "풀"이 되어야만 한다고 외친다.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미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했던 휘트먼이 "풀"에 큰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듯이, 리브스 역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인간"적 규범이며 질서 따위에서 벗어나 "풀"처럼 자유로이, 끈덕지게, 그러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이나 정원과는 달리, 야생의 "풀"은 인간의 손길에 의해 길들여지거나 통제되지 않는다. 그저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생명체의 생존 방식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키가 훌쩍 커졌다가는 또 시들어 갈 뿐이다. 먹이 사슬의 가장 아래쪽에 놓인 존재이기에 아무 힘도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풀"은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어서 지치지도 않고 스스로 삶을 이어간다. 누군가가 애써 가꾸고 영양을 공급하지 않아도 내적인 성장의 동력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풀"은 특별한 모양새를 뽐내며 돋보이려 노력하지 않는다. 하나의 개체가 다른 것들 위에 올라서기보다는 바람과 햇살, 토양을 주어진 대로 공유하면서 같이 얽혀서 자라난다.


이런 "풀"이 되어야만 한다고 아이들에게 힘주어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우리 사회에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동안 전달해 온 메시지는 어떤 것이었는지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경쟁을 부추기고 물질적 욕망을 한없이 강조하면서 오직 너 하나만이 특별해야 한다며 이상적이라고 정해진 삶의 틀을 계속 강요해 온 결과,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미처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절망을 마음 한에 품고 사는 듯하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끝도 없이 서로 비교하고 질투하는 문화 속에서 종말의 "화염"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더욱 비관적인 전망은 이런 "화염" 속에서도 그나마 새로운 세대를 계속 생산해 온 '사랑'이라는 에너지조차 한국 사회에서는 지금 빠르게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현실에서 나온다. 이 상황이 이미 "무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금 그 위에서 돋아나는 "풀"이 되라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감히 말할 수 있는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인가? 세상의 끝에 서서 희망을 외치는 시인의 목소리는 우리가 쉽사리 답할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답해야 하는 무겁고 중요한 질문을 던져 준다.



조희정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과 낭만주의 이후 현대까지의 대화시 전통을 연결한 논문으로 미시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독자와의 소통, 텍스트 사이의 소통 등 영미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화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국제시사·문예 매거진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급변하는 세상의 조망을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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