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SOS 소용 없었다…338명 바닷속으로, 시신 18구만 인양[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채태병 기자 2023.12.1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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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71년 제주 서귀포항에 세워진 남영호 위령탑. 이 위령탑은 1982년 서귀포시 상효동으로 옮겨진 뒤 2014년 현재의 서귀포시 동홍동 정방폭포 주차장으로 이설됐다. /뉴스1, 한국향토문화대전 제공 1971년 제주 서귀포항에 세워진 남영호 위령탑. 이 위령탑은 1982년 서귀포시 상효동으로 옮겨진 뒤 2014년 현재의 서귀포시 동홍동 정방폭포 주차장으로 이설됐다. /뉴스1, 한국향토문화대전 제공


53년 전인 1970년 12월 15일 새벽, 제주 서귀포시 서귀포항에서 전날 출항해 부산~제주를 잇던 여객선 남영호가 침몰했다.

사고 당시 남영호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338명이었다. 길이 43m와 폭 7.2m, 중량 363톤의 남영호 정원은 321명으로 알려졌다. 남영호는 정원보다 약 20명 많은 인원이 배에 탑승했음에도, 안전 수칙을 무시한 채 운항했다.



부산지방해난심판원의 남영호 침몰 사고 관련 재결서(1971년 9월 6일)에 따르면 당시 남영호에 탑승한 338명 중 생존자는 15명뿐이었다. 사망자는 18명, 실종자는 305명이었다. 희생자 323명 가운데 18구의 시신만 인양된 것이다.

이는 국내 해상 참사 사망자 수 2위에 해당하는 사고로, 과거 기록이 정확하게 집계되기 어려웠다는 것을 감안하면 추가 사망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해상 사고는 1953년 1월 창경호 침몰 사고(사망 330명)다.



남영호는 사고 전날(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쯤 서귀포항에서 20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 이어 서귀포시 성산항에서 승객 100여명을 추가로 받고, 같은 날 오후 8시쯤 부산으로 출발했다.

성산항을 떠난 지 약 5시간 만인 15일 새벽 1시쯤 남영호 선체는 강풍을 버티지 못해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남영호는 전남 여수시 소리도 인근에서 뒤집혔고, 선원들은 비상주파수를 이용해 두 차례 구조신호(SOS)를 보냈다.

남영호 침몰 사고 후 찾은 시신을 운구하는 모습. /뉴스1, 한국향토문화대전 제공 남영호 침몰 사고 후 찾은 시신을 운구하는 모습. /뉴스1, 한국향토문화대전 제공
하지만 구조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고 새벽 3시쯤 남영호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일본 순시선이 구조에 나섰는데, 같은 시각 대한민국 정부와 관련 기관들은 사고 발생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현재와 달리 남영호 사고 발생 시기에는 승선자 명부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도 진행되지 않아 사망자 수 등의 기록이 언론 보도나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럼에도 이 사고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과적에 의한 명백한 인재로 분석되고 있다. 선박 회사 측의 욕심에 승객 수가 정원을 초과했을 뿐 아니라 선적이 금지된 공간에까지 물품을 쌓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서다.

부산지방해난심판원은 남영호의 화물 창고 3곳이 감귤 상자로 가득 찬 상태에서, 회사 측이 선적 금지된 곳까지 감귤 상자 900여개를 추가로 적재했고, 이로 인해 출항 때부터 이미 선체 중심이 15도가량 기울었던 것으로 봤다.

부산지방해난심판원은 "선장은 선적 불량으로 선체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운항했다"며 "다량의 화물을 결박하지도 않은 채 갑판 위에 적재했고, 최대 탑승 인원을 초과하는 승객을 배에 타도록 했다"고 분석했다.

제주 서귀포시 동홍동 정방폭포 주차장 인근에 세워진 남영호 위령탑. /사진=뉴스1 제주 서귀포시 동홍동 정방폭포 주차장 인근에 세워진 남영호 위령탑. /사진=뉴스1
남영호 선장 A씨를 비롯한 사고 관련자 7명은 재판에 넘겨졌다. 선장 A씨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2년 6개월의 금고형을 받았다. 선주는 금고 6개월에 벌금 3만원, 통신장에게는 벌금 1만원이 선고됐다. 나머지 4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고를 축소하길 원했던 독재 정권의 탄압에 진상 조사도 추진되지 않았다. 남영호 사고 유족 나종열씨는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이어서 정부가 (유족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며 "지역 공무원과 교사 등도 각 기관에 압력을 넣어 입을 닫게 했다"고 회상했다.

정부는 사고 이듬해인 1971년 3월 위령탑을 서귀포항에 세웠다. 이 위령탑은 1982년 항만 확장 공사 등이 진행됨에 따라 서귀포시 상효동으로 이전됐다. 이후 위령탑에 대한 관리는 이뤄지지 않았고, 안내문도 없이 주변에 잡초만 무성하게 자란 상태로 방치됐다.

보다 못한 유족들은 2013년 '남영호 조난자 유족회'를 결성, 제주도와 서귀포시에 위령탑 관리를 요구했다. 도와 시는 유족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2014년 현재의 서귀포시 동홍동 정방폭포 주차장 서측으로 위령탑을 다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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