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걸스' 레전드 디바들의 '리즈시절' 명곡 8

머니투데이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ize 기자 2023.12.1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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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설인지 알게 해줄 꼭 들어봐야 할 노래

'골든걸스' 인순이(왼쪽부터) 이은미 신효범 박미경. 사진=KBS'골든걸스' 인순이(왼쪽부터) 이은미 신효범 박미경. 사진=KBS


필자는 시작부터 인순이 박미경 신효범 이은미의 걸그룹 골든걸스 데뷔가 수단이었지 목적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평균나이 59.5세 디바들이 걸그룹이 된다는 건 애당초 도달할 수 없는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감동과 위로를 전제한 단발성 예능 결과물로는 납득할 수 있어도 장기적 예술 비전으로는 무리한 기획이었다.

물론 박진영이 발 벗고 나선 일에 전혀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세대와 장르를 떠나 이들을 TV에서, 그것도 한 무대에서 다시 볼 수 있게 해 준 건 분명 박진영의 기획이 남긴 소중한 성과였다. 잊혀가던 가수들의 진수를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골든걸스의 데뷔 무대는 가치가 있었다. 단, 급조한 듯 1차원적인 가사에 트렌드만 챙기려다 당면한 ’One Last Time’의 길 잃은 그루브는 실시간 그들의 전성기를 지켜봐 온 나 같은 사람에겐 자꾸 옛날 생각만 나게 했다. 그래, 저들은 개성과 자유 없인 성립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지. 합창과 군무는 역시 그들과는 어울리지 않아. 한 무대이되 각자 노래들로 다시 설 넷을 기대하며, 골든걸스가 일궈온 ‘155년 경력’의 하이라이트를 엿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인순이, 사진=방송 영상 캡처인순이, 사진=방송 영상 캡처
인순이



#밤이면 밤마다=자신의 이야기 같았다는 ‘비닐 장판 위의 딱정벌레’와 ‘선물’도 중요하지만 인순이라는 가수를 대중의 뇌리에 새긴 곡은 누가 뭐래도 ‘밤이면 밤마다’였다. 모차르트를 흠모해 헤어스타일까지 똑같이 한다는 작곡가 김정택이 30대 초반에 쓴 이 곡은 빅밴드 브라스와 부기우기 피아노, 일렉트릭 기타 솔로가 한데 어울려 떠올리기 싫지만 끝내 떠오르고 마는 옛 님을 신나게 그리워하는 노래다. 언젠가 인순이는 3분짜리 노래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불러내는 셜리 베시를 좋아한다고 밝혔는데, 그는 라이브에서 떼창을 유도하는 “몰라” 코러스를 압권으로 장착한 ‘밤이면 밤마다’에서 그런 자신의 영웅을 부분적으로 따랐다.

#이별연습=골든걸스 이전 인순이가 젊은 세대들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소화한 세 곡은 박진영과 작업한 ‘또’, 조PD와 함께 한 ‘친구여’, 그리고 카니발의 것을 리메이크한 ‘거위의 꿈’이었다. 프로듀서 겸 작곡가 김형석이 작사/곡, 편곡을 모두 맡은 ‘이별연습’은 96년작 ‘The Queen of Soul’에서 첫 곡 ‘또’에 이은 두 번째 트랙이었다. 당시 앨범 속지에 인순이는 “완벽하고 멋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더 아름다운 것 아닐까”라고 썼다. 패티 김을 롤모델로 스탠더드와 재즈를 지향해 온 90년대 중반의 그는 설렘과 불안을 안고 “젊은 음악”에 도전하려던 20년 차 가수였다. 그런 인순이가 가만히 힘을 빼고 80~90년대 영미권 팝 사운드를 정의 내린 데이비드 포스터 풍 무드 속에서 슬픔의 불꽃을 피워 올리는 ‘이별연습’은 그 시대에 20대를 보낸 사람들에겐 생애 잊히지 않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신효범, 사진=방송 영상 캡처신효범, 사진=방송 영상 캡처

신효범

#언제나 그 자리에=골든 걸스와의 고리를 찾으려면 '사랑을 누가'나 '자기 연출'을 언급해야 하지만 신효범의 대표곡을 얘기하려면 ‘언제나 그 자리에’를 가져와야 한다. 작사 신효범, 작곡 홍성규. 두 사람은 데블스 출신 거물 음악가 연석원의 제자들로, ‘언제나 그 자리에’ 편곡이 스승의 손을 거치면서 곡은 크레디트만으로도 어떤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되었다. 신효범의 세 번째 앨범을 빛낸 ‘언제나 그 자리에’는 그가 연석원 아래서 해나가려던 4년 과정 공부를 2년 8개월에서 접게 만든 곡이었다. 그만큼 반향이 컸고, 신효범 하면 ‘난 널 사랑해’와 더불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90년대 명 발라드로 남았다. 비단 같은 가성과 밀도 높은 진성을 넘나 들며 가수로서 표현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후렴의 가창은 언제 들어도 전율이다. 벌써 31년 전 일이다.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전성기가 지났다고 간주된 2006년, 신효범은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로 제2의 전성기를 선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좋은 곡도 마케팅의 힘을 받지 못하면 김 빠진 맥주 신세를 면할 수 없는 법.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의 홍보를 하지 못한 곡은 결국 아는 사람만 아는 곡으로 남고 만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난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전미도가 이 노래를 부르며 차트 역주행을 한 것이다. 첫 만남의 사랑을 확신하고 남은 사랑을 다짐하는 노랫말이 세대를 초월한 위로를 전하며 신효범이라는 이름을 2020년 '실검 1위'에 올렸다. 한때 후렴구가 휘트니 휴스턴의 ‘Didn't We Almost Have It All’과 비슷하단 논란이 있었지만 코드의 유사성 정도에서 그쳐도 될 논란이었다. 만약 그 유사성이 심각했다면 휘트니를 좋아해 휘트니를 커버했고, 나아가 ‘한국의 휘트니’라고까지 불린 신효범이 부를 때 그걸 감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박미경, 사진=방송 영상 캡처박미경, 사진=방송 영상 캡처
박미경

#이유 같지 않은 이유=도입부 15초를 먹어버리는 솔(soul) 보컬 솔로, 스톱/스킵 버튼 누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건반 중심의 하우스 비트, 거칠게 돌진하는 허스키 보컬, 갈 테면 가라는 이별 선언. 당대 한국대중음악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라인음향의 수장 김창환이 가사를 쓰고 그 라인음향 소속이었던 노이즈의 천성일이 곡을 만든 데다, 편곡도 ‘김창환 사단’의 김형석이 했으니 곡이 히트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같은 소속사의 김건모만큼이나 블랙 뮤직의 본질을 잘 아는 박미경의 터프한 가창력까지 받쳐 주었으니 상황은 완벽했다. 물론 골든걸스에서 다루려 한 장르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박미경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선 '집착'의 퍼포먼스를 봐야 하지만, ‘이유 같지 않은 이유’는 댄스와 관련된 박미경 커리어의 시발점이었기 때문에 여기선 더 중요하다.

#기억 속의 먼 그대에게=박미경은 발라드 가수이기도 했다. 85년 여섯 번째 ‘강변가요제’에서 ‘민들레 홀씨 되어’를 불러 장려상을 받은 게 그 시작이다. 통상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실린 앨범을 그의 1집으로 치지만 사실 박미경은 그보다 앞서 발표한 작품에서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이라는 또 다른 발라드를 불러 소소하게 히트시켰다. 음악 스타일이 어떻든 감동에는 위아래가 없었다. 박미경의 폭발적인 가창력은 빠른 곡에서나 느린 곡에서나 똑같이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김창환의 아름다운 노랫말이 신재홍의 세련된 멜로디에 그림처럼 스며든 ‘기억 속의 먼 그대에게’는 신재홍이 남긴 또 다른 명곡들(조정현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 원미연의 ‘이별 여행’, 임재범의 ‘사랑보다 깊은 상처’)과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한 국산 발라드의 품격을 대변했다.

이은미, 사진=방송 영상 캡처이은미, 사진=방송 영상 캡처
이은미

#기억 속으로=이은미는 모두가 알듯 골든걸스와 가장 멀었던 가수다. 그는 핑크빛 무대 의상 대신 어둡고 자유로운 옷을 걸친 채 슬픔과 고독의 근처를 맨발로 서성이는 싱어였다. ’기억 속으로’는 그런 ‘맨발의 디바’ 이은미의 데뷔작 타이틀 트랙이다. 1분 가까이 풍경처럼 번지는 오승은의 클래시컬 편곡을 뚫고 찬란하게 이별을 후회하는 이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를 만든 이는 문창배라는 인물로, 장나라나 진주의 앨범 등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지만 그리 다작을 한 작곡가는 아니다. ‘기억 속으로’는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진다. 그 과작 속에서도 90년대를 대표할 발라드 한 곡을 피워냈으니 말이다. ‘기억 속으로’는 원곡도 좋지만 라이브로도 꼭 들어보길 권한다. 한 소절 한 소절 아껴 부르는 이은미의 다채로운 표정과 굵은 바이브레이션에서 원곡에는 없던 생기가 샘솟는다.

#어떤 그리움=지금은 뮤직 퍼블리싱 회사 잼팩토리 대표로 활약 중인 오승은이라는 이름은 이은미의 시작에서 중요했다. 그는 그녀의 1, 2집 프로듀싱과 편곡을 맡아 했는데 이것이 이은미라는 가수의 색깔을 거의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으로’와 달리 스트링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어쿠스틱 기타를 전면에 배치한 오승은의 도입부는 임기훈의 곡에도 윤기를 입혔다. 이은미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쓸쓸한 울먹임, 절제가 곡을 온통 가을빛 그리움으로 물들이는 한편, 해외 스튜디오에서 해외 뮤지션들과 작업한 곡답게 순수한 세련미는 곡 전체를 적신다. 작곡가 임기훈은 코요테가 부른 ‘만남’의 원곡인 ‘당신과 만난 이날’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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