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제2실리콘밸리' 혁신 클러스터 성공하니 돈·사람 몰렸다

머니투데이 채플힐·더럼(미국)=정진우 기자 2023.12.1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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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TP) 성공 비결 살펴보니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esearch Triangle Park, RTP) 본부 건물/사진= 정진우 기자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esearch Triangle Park, RTP) 본부 건물/사진= 정진우 기자


미국 동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Durham)시 인근에 위치한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esearch Triangle Park, RTP). 지난 1일 찾은 이곳 본부(headquarters) 메인빌딩 1층 회의실에선 캐주얼 복장 차림의 연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과 건물 내 곳곳엔 'FRONTIER'(개척자)란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고 연구원들은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 찾기에 골몰했다. 연구원들이 전세계 곳곳에서 모인터라 피부색은 달랐지만 이들의 열정만큼은 똑같이 붉게 타올랐다.

이곳에서 만난 연구원들은 RTP가 세계 최고 혁신 클러스터라고 자부했다. RTP를 운영하는 리서치 트라이앵글 재단(Research Triangle Foundation, RTF) 관계자는 "RTP는 연구원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으로 전세계 수많은 기업들이 몰리고 있다"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장착한 인재들이 서로 연구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RTP는 미국 동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주도인 롤리시(NCSU)와 듀크대학교가 있는 더럼시, UNC가 있는 채플힐 사이에 조성됐다./자료= RTFRTP는 미국 동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주도인 롤리시(NCSU)와 듀크대학교가 있는 더럼시, UNC가 있는 채플힐 사이에 조성됐다./자료= RTF
RTP의 탄생, 미국의 혁신을 이끌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정부 주도로 1959년에 설립된 RTP는 서울 여의도(2.9㎢)보다 약 10배(28.3㎢) 큰 규모의 세계적 연구단지이자 혁신 클러스터다. 이곳은 세계적인 대학교 듀크대학교(Duke University)와 노스캐롤라이나대-채플힐(UNC) 캠퍼스,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NCSU) 등 세 학교의 중간 지대에 조성됐다. 지도 상에 세 학교를 선으로 이은 삼각형 중앙에 위치해 트라이앵글(삼각지대)이란 이름이 붙었다. RTP의 개발과 운영은 주정부와 지방정부, 현지기업 등으로 구성된 민간 비영리법인 RTF에서 맡고 있다.



RTP는 중앙정부 주도의 하향식 방식이 아닌 지방정부와 지역대학, 기업 등이 주도하는 상향식 개발로 만들어진 게 특징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는 1950년대만 해도 1인당 소득이 전국 48개 주 중 47위에 머물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첨단기술 산업 기반은 없고 담배, 직물, 가구 제조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RTP가 조성된 위치도/자료=RTFRTP가 조성된 위치도/자료=RTF
주정부는 RTP 조성 초기 단계부터 외부 대기업 및 연구기관 유치와 같은 외생적 발전전략을 추진했다. 미국에서 톱 클래스급 대학 3개가 인접한 덕분에 우수한 인력들을 쉽게 끌어 모을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기업과 연구소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 주정부의 노력과 우수한 인재가 결국 지금의 RTP 근간이 됐다.


풍부한 녹지로 둘러싸여 거대한 공원처럼 조성된 RTP는 뉴욕과 마이애미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과 롤리-더럼 국제공항(RDU)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자리해 이동성도 좋다. RDU에선 국내선과 국제선을 합해 하루에 400편의 비행기가 오간다. 미국의 '제2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이곳엔 하이테크(HiTech), 애그테크(AgTech), 생명공학(BioTech) 등과 관련된 다양한 산업군에서 IBM, SISCO, DELL, BASF, BIOGEN 등 글로벌 대기업 연구소가 있다. 앞으로 애플을 비롯해 구글도 이 곳에 연구 캠퍼스를 지을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또 국립환경위생연구소와 같은 국책 연구기관을 비롯해 벤처기업 등 모두 375개의 기관·기업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RTP에서 일하는 연구원과 직원 등은 6만여명에 달한다. 이들 기업들은 걸어서 5~10분 혹은 자동차로 10~20분 내외에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연구원들끼리 공동 연구와 협업이 쉽게 이뤄진다. RTF의 역할은 RTP에 입주한 기업간 협업을 돕고 이들 기업의 성장에 필요한 정책을 지원하는 것이다.

거대한 공원처럼 조성된 RTP 모습/사진= 정진우 기자거대한 공원처럼 조성된 RTP 모습/사진= 정진우 기자
RTP는 명성에 걸맞게 투자도 크게 늘고 있다. 2015년 11억8000만 달러 수준에서 2020년 34억3000만 달러로 5년 사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기업과 투자가 늘다보니 이 지역에 사람들도 계속 몰리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도인 롤리(Raleigh)와 더럼, 케리(Cary) 등 RTP를 둘러싼 주변 도시엔 지난해 기준 230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 2000년만 해도 이 지역 인구는 119만명이었는데 20년새 2배 가까이 증가했다. RTF는 오는 2030년엔 약 270만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주택과 상가 등 각종 건물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RTF에서 마케팅&커뮤니케이션 이사를 맡고 있는 잰 막탈은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과 최고 수준의 인재를 노스캐롤라이나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우리 지역의 산업, 대학 및 인력 간의 협업을 촉진하고 노스캐롤라이나 주민들에게 경제적 영향을 창출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RTP지역 인구 증가 모습./자료=RTFRTP지역 인구 증가 모습./자료=RTF
'혁신 클러스터' 성공의 조건
RTP의 성공은 지방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산·학·연 협업의 산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1980년대까진 RTP의 성장과 발전은 거의 전적으로 IBM과 같은 대기업들이 R&D 시설을 만든게 특징이었다. 이때부터 RTP는 신생 연구 및 기술 회사들에게 일하기 좋은 장소라고 알려졌다.

주정부는 저렴한 땅값과 세금감면, 대출, 보조금, 상담 및 네트워킹 등 기업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정책을 지원했다. 이런 전통은 아직까지 이어진다. 최근 미국 CNBC는 기업들의 비용절감 등 각종 실적을 토대로 RTP가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를 '미국에서 가장 비즈니스하기 좋은 주'(America's Top State for Business)로 2년 연속 꼽았다. 연구원들의 주거비용과 생활비, 물가 등은 뉴욕, 캘리포니아 등에 비해 저렴하다. 일례로 지난 7월 기준 RTP 지역 평균 휘발유값은 1갤런 당 3달러 안팎이었지만 실리콘밸리와 LA가 있는 캘리포니아 지역은 5달러로 큰 차이가 났다. 미국 평균이 3.5달러였다.

RTP에 들어서 글로벌 대기업들. 산업별 분포도로 나타냈다./자료= RTFRTP에 들어서 글로벌 대기업들. 산업별 분포도로 나타냈다./자료= RTF
연구기관들도 혁신 클러스터 성공에 한 몫 했다. RTP가 조성될 때 만들어진 RTI(Reseach Triangle Institute)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은 RTF가 주변 세 대학들과 협동·공조체제로 만든 연구기관이다. RTP에 들어설 기업과 연구소들의 효율적인 운영을 돕고 각종 사업운영과 창업보육, 인적교류 등을 책임진다. 우수한 기업들의 입주를 견인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아울러 자체 연구 역량을 토대로 미국 최대 규모의 민간 연구기관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세 대학들이 함께 설립한 공동캠퍼스 TUCASI(Triangle Universities Center for Advanced Studies Inc.)에서도 다양한 주제의 공동 연구를 진행하며 RTP 기업들과 협업을 한다.

이처럼 1990년대 이후 RTP의 산·학·연 협업 모델은 큰 성공을 거뒀다. 많은 기업들이 이 지역 대학 파트너인 듀크대, UNC, NCSU와 다양한 사업 기회를 만들었고 특히 NCSU 출신이 개발한 SAS(통계프로그램) 통계 및 분석 전문 지식을 적극 활용했다. RTP 관계자는 "대학에는 인재들이 넘쳤고, 소속이 다른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아이디어들이 많이 쏟아졌고, 이들의 협업이 끊임없이 이뤄졌다"며 "대기업들의 계약 연구와 임상 시험 아웃소싱 기회를 토대로 RTP는 계속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RTP에 위치한 기업들 위치도RTP에 위치한 기업들 위치도
RTP에 들어선 세계적 기업들이 서로 연구 역량을 공유하고 협업하며 새로운 사업과 가치를 창출하는 사례가 늘다보니 이곳은 자연스럽게 미국의 성공적인 혁신 클러스터가 됐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최근 미국에서 생명과학 분야 고용에서 상위 3개 주에 속하며 백신 연구와 제조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두주자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RTP는 자체 자료를 통해 "노스캐롤라이나에는 860억 달러 규모의 농업용 생명공학 산업이 있다"며 "이를 통해 2050년까지 90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밖에 RTP에 있는 퍼스트 플라이트 벤처센터(FFVC)는 RTP의 창업보육센터로 벤처기업에 사무실과 연구 공간을 임대해주고 있다. 1991년 설립된 이 센터는 벤처 탄생의 요람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외에도 세계적 수준인 듀크대 병원과 UNC 병원을 필두로 한 헬스케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창업 등 연관 산업이 커지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대-채플힐(UNC) 저널리즘스쿨 이수만 교수는 "다양한 산업군에서 세계적인 기업들이 RTP를 찾고 있는 건 주정부의 확실한 지원과 훌륭한 연구대학, 좋은 생활여건 등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며 "RTP는 가장 성공적인 혁신 클러스터로서 훌륭한 산·학·연 협업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RTP에는 신규 건물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사진= 정진우 기자RTP에는 신규 건물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사진= 정진우 기자
우리나라에 던지는 시사점
우리나라도 혁신 클러스터를 통한 지역 균형발전 등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인 '지역특화형 산업육성으로 양질의 일자리 창출'(국정과제 118번)이 바로 혁신 클러스터와 궤를 같이 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지역 혁신 클러스터 활성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혁신도시, 산업단지 등을 중심 거점으로 비수도권 14개 시·도에 1곳씩 지역 혁신 클러스터를 지정했다. 산업부는 그간 각 시·도와 함께 클러스터별 특화산업 육성에 필요한 기술개발, 기업 유치, 네트워크구축·운영 등을 지원했다. 지난 5년 간(2018~2022년) 총 6418억원(국비 3759억원, 지방비 등 2659억원)을 투입했다.

IBM 연구소 입구 모습/사진= 정진우 기자IBM 연구소 입구 모습/사진= 정진우 기자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혁신 클러스터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RTP처럼 산·학·연 협업이 유기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높은 건물만 짓는 등 하드웨어에 집중하고 소프트웨어(산·학·연 협업 시스템, 사업 아이템 등)엔 소홀하면 성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규제를 과감히 풀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인재가 몰릴 수 있는 훌륭한 정주여건을 조성하는 등 연구역량이 집중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전윤종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장은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국가 R&D를 통한 기업 성장의 디딤돌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여전히 우리 기업들이 국가 R&D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게 인식하고 있다"며 "중소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이 된 많은 기업들도 초창기에는 국가가 지원하는 R&D를 수행하면서 연구소와 대학과의 협업을 통해 지원을 받고 성장했다. 우리나라도 성공적인 혁신 클러스터를 만들려면 결국 유기적인 산·학·연 협업 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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