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

머니투데이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2023.10.31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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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토욕혼(吐谷渾)은 4세기부터 7세기 초반까지 오늘날 중국 칭하이성 일대에 있던 유목국가다. 선비족의 지파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토착나라를 세웠다. 토욕혼을 반석에 올린 군주로 모용아시(慕容阿豺)가 있다. 모용아시에게는 20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죽기 전 아들을 모두 불러모은 뒤 말했다. "내 화살 하나씩 줄 테니 다들 부러뜨려 보거라." 그러자 누구 하나 빠짐없이 화살을 부러뜨렸다. 그러자 한 아들을 불러 말했다. "그럼 너는 19개 화살을 부러뜨려 보아라." 그는 온 힘을 다했으나 끝내 부러뜨릴 수 없었다. 모용아시가 아들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알겠느냐? 하나를 부러뜨리기는 쉬워도 여러 개를 한 번에 꺾기는 어렵다. 너희가 전력을 다해 마음을 모으면 사직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용아시는 이 말을 끝으로 숨을 거뒀다. 유목 또는 수렵민족 사이에서 화살은 하나의 편제나 집단 또는 일족을 뜻하기도 했으니 모용아시의 유언은 꽤나 상징적 의미가 내포됐다고 하겠다.

일본 센코쿠 시대 모리 모토나리(1497~1571년)란 다이묘가 있었다. 센코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지략이 뛰어나 히로시마현 서부에서 시작해 주코쿠 지역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슬하에 세 아들을 뒀는데 각기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죽기 전 모토나리는 세 아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화살을 하나씩 나눠주고 부러뜨리라고 명령했다. 모두 쉽사리 분지르자 이번에는 3개 화살을 부러뜨리라고 했다. 그러자 어느 한 명도 부러뜨리지 못했다. 모토나리는 화살 하나는 약하지만 3개가 뭉치면 강하다며 형제끼리 화합과 단결을 당부했다. 이 일화는 '3개의 화살'이라는,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다. 일본 정부가 장기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세운 아베노믹스의 3대정책인 '3개의 화살'도 여기서 온 말이다. 기실 모토나리의 임종을 지킨 것은 아들 중 한 명뿐이었던 데다 이때는 이미 큰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인 까닭에 이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토나리는 평소에도 세 아들의 단합과 일족의 단결을 강조했고 또 그 지침으로 '삼자교훈장'(三子敎訓狀·세 아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문서도 남겼다. 이런 까닭에 '3개의 화살'은 역사적 실존 여부와 별개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하나는 5세기 내륙아시아 유목국가의 역사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16세기 일본이 배경인 설화다.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을 무대로 하지만 두 이야기는 무척 닮았다. 형제간 단합을 강조하는 주제나 아버지가 절명 전 아들을 모아놓고 처음에는 화살을 하나씩, 다음은 모아서 꺾어보라고 하는 줄거리까지 모두 동일하다. 단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자식 수에 따라 화살의 개수가 달라졌을 뿐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우리 전래동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솝우화에도 등장한다.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재담꾼 한 명의 창작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이야기는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그곳의 특색에 맞게 각각의 스토리로 다시 태어났다. 이럴 때 곧잘 나오는 것이 바로 '원조' 논쟁이다. 물론 이야기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또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일지 모른다. 하지만 원조가 어디라고 해서 파생된 여러 이야기를 줄 세워놓고 순위를 매긴다거나, 혹은 가치를 절상 또는 절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자연스레 그곳의 것이 돼버렸기 때문이요, 또 그 기원을 찾는다 해도 그 가치는 수많은 번안물이 있기에 빛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느 선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내 돈이라고 하는 건 내가 버는 돈이 아니야. 쓰는 돈이지." 문화야말로 이런 것이 아닐까. 어디서 기원했든 지금 누리고 즐기고 꽃 피운 사람들이야말로 그 주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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