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도시에서 공동체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공동체로 묶이기 전에 타자와의 관계를 종료한다. 공동체의 탄생과 확산을 막는 것이 오늘날 도시적 삶의 특징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를 '공적 공간'으로 불렀다. 타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회피하는 현대인들이 막상 공동체가 해체되고 사라지자 '위안의 감정, 안락한 소속감'을 그리워하면서 '쇼핑'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수단을 통해 공동체적 감각을 잠시나마 복원한다는 것이다.
황종권 시인의 산문집 '방울 슈퍼 이야기'를 읽었다. 시인이 나고 자란 1980~90년대 '여수 국동'은 평화롭던 유년기 체험의 유토피아였겠지만 '어른의 세계'에서는 바닷마을이 해양도시로 전환하는 산업화, 도시화의 과도기였다. 1979년 건설된 여수산단이 호황을 누리고 엑스포 개최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면서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대로와 고속철 등 서울식 인프라가 자리잡던 시기다. 도시적 삶이 보편화하면서 여수에서도 점점 '이웃'이라는 말의 온기와 부드러움이 사라져가던 그때 시인의 어머니는 '방울슈퍼'를 열었다. 이 책은 여수의 한 작은 동네 '점빵'인 방울슈퍼를 무대로 개성 넘치는 이웃들이 함께 웃고 울던 세월을 그리고 있다.
슈퍼는 그 규모나 형식으로 볼 때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와 완전히 대비되는 사적 공간이지만 개인의 내밀한 삶이 '평상' 위에서 공동화하는 진정한 공적 공간이다. 아이가 이불에 오줌 싼 이야기, 화분에 방울토마토가 잔뜩 열린 이야기, 드라마 보다 운 이야기 따위는 사소한 개인사들이지만 웃음과 울음, 때로는 어깨를 다독이는 스킨십 안에서 공유된다. 쇼핑은 핑계다. 고무장갑 사러 갔다가 3시간 앉아 떠들다 온다. 껌 사러 갔다가 막걸리 댓 병 마시고 취한다. 그렇게 '함께 산다'는 감각을 새긴다. 슈퍼가 있는 동네에서 사람들은 외롭지 않다.
도시가 그리워하는 공동체의 기억을 슈퍼는 붙들고 있다. 슈퍼가 있던 시절 서울은 도시지만 아직 마을이기도 했다. 골목길에 가득했던 사람의 마음들, 노을이 붉게 물드는 하늘 아래 낮은 담장마다 능소화가 즐겁게 질주하고 가스통 굴러가는 소리가 퍼져가던 여름 저녁이 생생하다. 눈이 내리면 아이들이 기성품 아닌 종이박스나 비료포대, 장판 등 개성 넘치는 개인용 썰매를 들고 모여들던 골목길이 그립다. 하루의 고단한 밥벌이를 마친 아버지가 술에 취해 통닭을 들고 휘적휘적 걸어오던 밤늦은 골목길, 거기 동네를 등대처럼 밝히던 슈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