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독이 든 성배

머니투데이 이정혁 기자 2023.06.02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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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 (서울=뉴스1) 한재호 기자 KTX가 개통 10주년(4월 1일)을 앞둔 30일 서울역 승강장에 정차한 KTX산천열차 옆으로 이용객들이 지나고 있다.  2004년 세계 5번째 고속철도로 운행을 시작해 "전국 반나절 생활권" 시대를 개막한 KTX는 지난 10년간 누적 이용객 4억1400만명, 하루 이용객 15만명, 총 운행거리 2억4000만㎞의 기록을 남겼다. 2014.3.30/뉴스1 = (서울=뉴스1) 한재호 기자 KTX가 개통 10주년(4월 1일)을 앞둔 30일 서울역 승강장에 정차한 KTX산천열차 옆으로 이용객들이 지나고 있다. 2004년 세계 5번째 고속철도로 운행을 시작해 "전국 반나절 생활권" 시대를 개막한 KTX는 지난 10년간 누적 이용객 4억1400만명, 하루 이용객 15만명, 총 운행거리 2억4000만㎞의 기록을 남겼다. 2014.3.30/뉴스1


"임기를 다 채우는 게 이상한 자리가 됐다."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사장 선임을 앞두고 국토교통부 안팎에서 들리는 얘기다. 지난 2005년 철도청에서 '코레일'로 전환한 이후 임기를 끝까지 채운 수장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이 자리가 정치적 외풍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실제 시장형·준시장형을 통틀어 36개 공기업 가운데 임기 만료를 경험하지 못한 곳은 코레일 밖에 없다. 그래서 코레일 사장 자리를 빗댈 때 흔히 '독이 든 성배'라는 표현을 쓴다.



코레일은 역대 사장 10명 중 2명(1대, 3대)이 구속되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2명(4대, 6대)은 국회의원 총선거 출마를 핑계로 사장직을 버렸고 나머지 사장들은 '사고 뒤 사퇴'를 반복했다.

심지어 비전문가 출신의 일부 사장은 사고 수습도 하지 않고 사퇴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크고 작은 사고 이후 코레일을 향한 국민적 분노가 커질 때마다 정치권은 사퇴를 종용한다.



이런 잔혹사는 코레일 사장직을 정권의 전리품 정도로 생각하는 관행 탓이 크다. 그동안 임명된 역대 사장들 면면을 보면 철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감사원이나 경찰 등 사정기관 출신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꿰찼다.

우리나라는 일본(1964년 신칸센 개통), 프랑스(1981년 TGV), 독일(1991년 ICE), 스페인(1992년 AVE)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 고속열차 보유국이다. 지난 2004년 국내 처음 도입된 1세대 고속철 'KTX-1'은 TGV(떼제베)를 기반으로 제작됐다.

고속열차 후발주자임에도 기존 TGV보다 1.5배 강력한 1만8000마력 추진시스템을 자체 개발했다. 제작사인 프랑스 알스톰사의 기술 이전을 받아 1998년 10월 제작에 들어간 뒤 불과 3년6개월 만에 거둔 성과다.


글로벌 시장에서 얼마든지 통용될 기술력을 갖췄지만 브라질 등의 고속철 수출길에서 번번히 고베를 마셨다. 철도산업 전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부족한 역대 코레일 수장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고속철도 기술을 이전한 SNCF(프랑스 철도공사) 장 피에르 파랑두 CEO(최고경영자)는 유럽 최고 철도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81년 입사해 TGV '파리~릴' 구간(220㎞)을 개척한 성과를 인정받아 현지 철도 연합체인 '페르 드 프랑스'(프랑스철) 대표도 맡고 있다.

SNCF는 CEO의 강력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디지털 모빌리티 사업'에 출사표를 던졌다. '유럽 철도왕'으로 불리는 DB(독일 철도청)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수소열차 정규 운행에 성공했다.

세계철도시장은 환경과 안전, 도시화 등에 따라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유라시아 진출을 노리는 한국 철도산업 역시 내년 'KTX 개통 20주년'을 맞아 기로에 섰다.

최근 코레일 사장에 여당 출신 정치인과 국토부 전직 관료 등 10여 명이 응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대 사장 중 철도 전문가는 3명에 불과하다. 이번에도 정치적 논공행상을 위한 자리로 전락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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