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피해를 당했고, 가해 학생과 같은 교실이 힘들어 해맑음센터에 온 아이들. 피해 학생들끼리만 다닐 수 있는 게 전국에 고작 하나인데, 그마저도 쫓아내버렸다.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교육부가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마지막 날, 유일하게 기댈 건 선생님의 토닥임 뿐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여기서 나가야 하는 게 그렇게 큰 의미인 거네요."(기자)
학교 폭력 피해 학생, 수빈이 말이었다. 회복에 전념하기도 바쁜 작은 아이가, 또박또박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해맑음센터에서 우릴 내쫓지 말라고.
울음과 흐느낌이 가득한, 구름 많은 흐린 날이었으나 "다시 돌아올게"란 약속만은 선명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쌤(선생님)들이 용기를 불어넣어 줬어요.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사랑한단 말도 많이 해주시고요. 전혀 잘했다 생각하지 않은 일인데, 잘했다고 해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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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금요일. 학교 폭력 피해 학생들에게 그리 중요한 이 학교가, 문을 닫는 날이었다.
60년짜리 건물, 대체 시설 4년째 요청했지만 無대책…갑자기 "나가라"
60년 된 건물. 쩍쩍 갈라진 바닥. '안전등급 E등급'은 예견된 거였다. 대책을 마련해달란 말만 지켜줬어도, 해맑음이 문 닫는 일은 없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야, 이게 많이 낡았구나' 그랬죠. 시설 관리 많이 해봐서 대번에 보고 알았죠. 보통 시멘트 수명을 40년 보거든요. 근데 여긴 60년 되잖아요."
그러니 뻔히 예견된 거였다. 2013년 처음 만든 학폭 피해 학생 학교에, 이 낡은 건물을 줬을 때부터.
4년 전부터 해맑음센터는 교육부에 요청해왔다. 옮겨갈 건물을 찾아달라고. 대책은 없었다. 지난해부터는 심각해졌다. 기숙사가 기울어 침대가 7cm씩 뜨고, 학교 바닥은 갈라졌다.
2월엔 기사를 썼었다. 당시 교육부 담당 과장은 "옮겨갈 부지를 찾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어 4월엔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직접 후보지까지 언급했다. 경기도 안산이 유력하다고 했다. 그런데 돌연 무산됐다고 말을 바꿨다.
5월 15일부터는 상황이 급박히 돌아갔다. 해맑음센터 안전 등급이 E등급이라며 폐쇄하란 거였다. 그날 오전엔 전화 통보, 오후엔 갑자기 교육부와 대전교육청 관계자들이 우르르 찾아와 "내일 (폐쇄 결정) 공문 보낼테니 나가라"고 했다. 이미 학교 폭력 피해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데, 2~3일 내에 다 비우란 거였다.
"전혀 예상 못 했어요. 안전 등급이 안 좋아 못 쓸 수 있다고, 안내라도 해줬어야죠. 교육부가 대책 없이 애들 나가라고 하는 거잖아요."(이동원 선생님)
갑자기 쫓겨난 7명의 아이들…"충격 받았어요", "이제 정들었는데"
쥐꼬리 예산에 페인트칠도 선생님들이 직접 한 건물. 비도 새고, 얼룩덜룩한 색깔이었으나, 피해 학생들이 편히 웃던 곳. 거기에 '출입금지' 빨간띠가 온통 붙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짧게는 일주일밖에 안 된 7명의 아이들은 상처를 다 치유하지 못한 채 여길 떠나게 됐다. 아쉬움이 짙은 듯, 저마다 이야길 털어놓았다.
갈 곳이 없어진 건 고양이 세 마리(코코, 유미, 백호)와 강아지 두 마리(단비, 비단)도 마찬가지. 선생님들이 돌볼 예정이지만, 상황이 분주해 임시 보호할 곳을 찾고 있다. 가능하신 분은 [email protected]로 연락주세요./사진=남형도 기자
"오늘은 아침 7시 전에 일찍 눈이 떠졌어요. 짐 정리하는데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여기처럼 좋은 선생님이 계셨던 곳이 없어요. 친구도 많이 생기고 외롭지도 않아 좋았고요. 이제 정들었는데…."(종호, 가명)
"팟캐스트를 만들고 있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희진쌤의 TMI에 대해서요. 근데 하나도 못 하고 떠나게 됐어요. 속상해요."(소정이, 가명)
"꼭 돌아올게"…선생님은 안아주고, 아이들은 슬피 울었다
안 울겠다던 아이들이, 별 수 없이 울었다. 아직 아이들이었다. 그것도 상처가 많은./사진=남형도 기자
조정실 센터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올해 66살, 그중 10년을 해맑음센터 대들보로 아이들을 지켰다. 그 역시 딸이 학교 폭력을 당했다. 아이가 겨울에 비싼 점퍼를 하도 사달라고 해서 사줬는데, 어느 날 잃어버렸다며 돌아왔다. 알고 보니 뺏긴 거였다. 그 아픔과 힘듦을 처음 알게 됐다.
그 당시 피해 학부모들과 연대했다. 조 센터장은 머리도 못 감고, 신문지를 덮고 자며 6년간 거리 캠페인을 했다. 그리 어렵게 만들고 지켜낸 곳이었다. 그러니, 마지막 날 전하는 말은 피를 토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을 서서 쓰다듬어주던 좋은 선생님, 조정실 센터장./사진=남형도 기자
학생들의 마지막 말도 이어졌다. 감사와 사랑, 그리움의 말들이었다.
선생님도 아이들이 안타까워 함께 울었다. 오직 애들 걱정뿐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아이들이 준비한 노래가 이어졌다. 015B의 '이젠 안녕'이었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 안 울 거란 다짐이 무색하게, 서로 안아주고 토닥일 땐 눈가에 뜨거운 게 가득했다. 불확실한 시간에서, 아이들에게 "꼭 돌아올게"라던 선생님들 약속만이 선명했다.
장난치고, 놀아주고, 지지해주고…"이런 곳은 여기 하나뿐"
애써 꽃받침을 하고 웃는다. 마지막 단체 사진./사진=남형도 기자
"제 아들이 6학년 때 학폭을 당해 굉장히 심하게 망가졌었어요. 학교에선 외면하고 덮기 급급했고요. 다 포기하고 싶을 때 해맑음이 제 자식 품듯 따뜻하게 맞아줬습니다. 해맑음은 사라지면 안 됩니다. 몇 년을 지켜봤지만, 이런 곳은 여기 하나밖에 없어요."
희진 선생님은 그 아이, 서준이를 이리 기억했다. "풀이 죽어서 왔더라고요. 눈치도 많이 보고요. 해맑음에 와서 1~2주만 되면 이렇게 밝고 말도 잘해요." 그 말대로, 서준이는 쾌활하고 농담도 잘하는 모습이었다. 원래 모습이 여기선 편히 나오는 거였다.
선생님 속도 말이 아니지만, 아이들이 더 힘들단 걸 잘 알아 위로한다. 아이들도 그걸 안다./사진=남형도 기자
"제2의 집이랄까요. 편안한 공간이었어요. 그보단 즐거운 게 더 많았지요. 체험 활동이 많은 것도 재밌었고, 친구들과 떠드는 시간도 좋았고요. 힘들 때마다 24시간 상담도 됐고요. 마음이 나아지더라고요."(수빈이)
"해맑음이요? 해맑음은 음, 해맑은 곳이에요(웃음). 되게 위축되고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해맑게 바꿔주는 곳이라 생각해요. 회복시켜주고 웃음을 되찾게 해주고요."(수아, 가명)
교육부가 내쫓은 아이들…"가해자 있는 학교로, 또 조퇴해야지요"
"힘들면 꼭 연락해야해", 전화번호를 건네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포옹은 늘 함께였다./사진=남형도 기자
"알아요. 그런데 거긴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있는 곳이에요. 저희가 지내기엔 힘들어요. 제가 모르는 가해자여도 2차 피해를 당할 수도 있고요."(수아)
실제로, 교육부가 말한 '가정형 위 센터'에 이미 갔다가 해맑음센터에 온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들이 아이에게 물으니 "저, 거기 갔다 왔어요"라고 답했단다. 거기서 가해 학생과 있느라 힘들었다고. 그런데 교육부가 거길 또 가라는 거였다.
맘 편히 갈 곳이 없단다. 해맑음센터를 문 닫게 한 의미가 그렇다. 폐쇄 후 일주일이 지났다. 25일, 조 센터장에게 연락이 왔다. "교육부 장관이 내일 온다고 합니다, 답을 들고 올까요?"
26일 몇 번을 미룬 뒤에야 해맑음센터를 찾은 이주호 교육부장관. 구체적인 대책은 없었다./사진=뉴시스
이 장관이 때늦은 '시급하게'란 표현을 쓰는 동안, 아이들의 힘든 하루는 다시 시작되었다.
텅 빈 교실, 아이들이 더는 없다./사진=남형도 기자
"교실을 다시 가진 못하겠죠. 눈도장만 찍고 조퇴해야 할 것 같아요. 집에 가서 혼자 있어야지요."
현우는 전학을 간다고 했다. 그마저 상황이 안 된단 서준이가 현우에게 말했다.
"부럽다, 난 전학도 못 가는데."
해맑음센터의 의미. 수료식 때 아이들이 직접 붙인 쪽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여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말이다. 10년을 이어온 진심, 학교 폭력 피해 학생들을 위한 교사들의 헌신과 전문성. 그 모든 게 다 있는데, 고작 건물 하나 마련해주지 못해 문을 닫게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시우(가명)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폭력을 당했다. 아이들이 침을 뱉고 때렸다. 계단에서 굴렸다. 학교 선생은 외면했다. 명랑했던 아이가 말수가 없어졌다. 방 안에 틀어박혔다. 아이도, 어머니도 공황장애가 생겼다.
힘들 때, 시우가 온 곳이 해맑음센터였다. 갈수록 말이 많아졌단다. 아이는 여기서 회복하고 성장했다. 대학도 갔다. 가수가 꿈이라고 했다. 교수님 칭찬도 많이 듣는단다.
해맑음센터가 문을 닫는 날, 시우가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다. 그날은 심지어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침 8시에 집에 왔음에도. 마지막이란 말에 속상해, 잠도 포기하고 한달음에 달려온 거였다.
'정말 그런 곳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새삼 눈에 밟혔다.
시우와 달리, 졸업하지 못한채 캐리어를 끌고 교문 밖을 나가던 7명의 아이들이.
2년 전에 기사를 썼었다. 이런 곳이 하나밖에 없단 게 기가 막혀서. 그리고 2년만에 기사를 또 쓰고 있다. 그 하나뿐인 곳마저 사라졌다고./사진=남형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