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 실무형 은행장

머니투데이 오상헌 기자 2023.05.23 05:43
글자크기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오래 전 한 시중은행 임원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갓 취임한 외부 출신 행장이 자신의 발언 도중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임원 한 명을 갑자기 일으켜 세웠다. 화가 단단히 난 은행장은 해당 부행장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뒤 회의실 뒤로 나가 서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 체벌이 일상이던 과거 '병영 교실'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대형 시중은행 임원회의에서 벌어진 것이다. 졸지에 벌을 서게 된 은행 임원의 벙벙함과 수치심이 어땠을지 미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보수적이고 경직된 은행 문화와 권위주의적인 은행장 리더십을 상징하는 사례로 상당 기간 회자된 일화다.

최근 국내 은행들의 임원회의 분위기는 이런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뭇 달라졌다. 통상 임원들은 회의 석상에서 은행장이 하는 얘기를 경청하고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만, 토를 달거나 대놓고 반론을 제기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저런 의견을 자유롭게 내고 행장과 토론을 주고받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한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상대적으로 젊은 내부 출신 '실무형 은행장'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은행별로 제가끔이긴 하나 60대가 대부분이었던 주요 은행 최고경영자(CEO) 자리는 대부분 내부에서 승진한 50대 CEO가 채웠다. 5대 은행 중 우리은행 외에 4곳 모두 내부 출신 인사가 행장이 됐다. 우리은행도 이달 말이면 내부 인사 중 1명을 새 CEO로 선임한다. 관료 출신 등 외부 인사가 하마평에 오르내린 IBK기업은행, Sh수협은행에서도 결국 내부 승진이 이뤄졌다. 지방은행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인지도와 중량감을 갖춘 카리스마형 리더는 아니지만 내부에서 차근차근 착실히 내공을 길러 온 실무형 CEO들이 대세다.

은행장들이 과거에 비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하루가 머다하고 쏟아지던 은행장 동정 기사가 이젠 흔치 않다. 은행보다 제 이름이 앞서는 걸 꺼리고 언론 접촉에 손사래를 치는 은행장들도 있다. 은행장의 일거수일투족과 신변잡기가 금융지주 회장 못지 않게 언론에 오르내리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풍경이다. 최근 만난 한 은행장은 스스로를 '영업사원'으로 규정하면서 "직원들이 열심히 일 할 수 있도록 좋은 영업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행장이 할 일"이라며 "내부 임직원과 고객들을 더 자주 만나려고 한다"고 했다. 본업과 무관한 외부 활동을 최소화하고 현업과 영업 현장을 제대로 챙기겠다는 다짐처럼 들려 반가웠다.



한 편에선 막강해진 금융지주 회장의 기세에 눌려 은행장의 권위와 실권이 떨어졌다는 자조도 없지 않지만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예전처럼 은행이 금융그룹을 온전히 먹여 살리던 시대는 지나고 있다. 은행장과 지주 회장이 파워게임을 벌이는 조직은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 금융그룹 지배구조 균열의 피해는 고스란히 고객들에게 돌아간다. 지주사가 지휘소라면 은행은 야전사령부다. 전장인 영업 현장을 챙기면서 금융소비자 보호와 건전성을 꼼꼼하고 세심하게 살필 줄 아는 야전사령관들의 성공을 기대한다.

[우보세] 실무형 은행장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