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뛰쳐나온 유이화와 차정숙, 그들 앞에 놓인 갈림길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3.05.0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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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과 ‘닥터 차정숙’으로 보는 기혼 여성의 타락과 성장

'종이달', 사진제공=KT 스튜디오 지니'종이달', 사진제공=KT 스튜디오 지니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는 어떻게 됐을까. ‘종이달’과 ‘닥터 차정숙’을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다.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주인공 노라는 자신을 인형으로만 보고 있던 남편을 뿌리치고 집을 떠난다. 1879년 발표된 이 희곡의 영향력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명한데, 이후 집을 나간 노라에 대해 수많은 후일담 작품이 파생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종이달’의 유이화(김서형)와 ‘닥터 차정숙’의 차정숙(엄정화)의 상황도, 2023년의 노라로 봐도 무방하다.

서스펜스 드라마인 지니 TV 오리지널 시리즈 ‘종이달’과 휴먼 메디컬 코미디를 표방하는 JTBC 토일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장르부터 판이한 분위기다. 유이화와 차정숙 또한 물과 기름처럼 다른 인물이고.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가정을 지닌 40대 기혼 여성이란 점, 오랜 시간 남편의 통제 하에 헌신적인 전업주부로 살아왔다는 점 정도. 오랜 시간 경력 단절을 겪었던 두 사람은 저마다의 계기로 다시 사회에 나온다. 유이화는 예전에 알던 직장상사 부인의 소개로 저축은행에 경단녀 전형으로 채용되어 VIP 고객을 담당하게 된다. 차정숙은 20년 전 중단했던 레지던트 과정을 다시 밟기로 결심하고 남편과 아들이 근무하는 구산대병원 가정의학과에 가까스로 레지던트 채용이 된다. 적어도 유이화와 차정숙은 경력도, 연줄도 없이 집을 나온 144년 전 노라와 비교하면 무척 상황이 좋아 보인다.



유이화가 저축은행 계약직으로 다시 일하게 된 것엔, 그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을 영수증 관리하며 극단적으로 통제하는 남편 최기현(공정환)이 지배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감정이 지배적이다. 남편에게 “난, 내가 이 집 빌트인 같아요”라고 갑갑함을 호소하며 “이 집이 내가 돌아오고 싶은 곳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할 정도다. 그마저도 “알아듣게 말해요”라며 답답해하는 남편에겐 와닿지 않는 호소였지만.

차정숙은 급성 간염이 오며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남편 서인호(김병철)와 시어머니 곽애심(박준금)의 뼈아픈 외면을 보고 배신감을 느끼고, 가까스로 살아난 뒤에야 자신의 처지를 각성한다. 우아하고 완벽했던 아름다운 가족이라 믿어왔지만 그들 사이에서 차정숙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게 되는 것. 토끼 같은 아들딸도 있건만, 차정숙 또한 빌트인 가구 같은 존재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랜 경력 단절 끝에 사회에 나선 두 사람의 행보는, 두 사람의 성격만큼이나 극과 극을 달린다. 유이화는 VIP 고객의 외손자 윤민재(이시우)라는 존재와 백화점에서 돈에 의해 달라지는 친절의 금액으로 상기한 분노를 계기로 고객들의 돈을 횡령하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부유한 미술가 집안에서 자랐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부친의 운전기사 아들이던 남편과 결혼한 유이화는, 돈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옥죄는 남편 밑에 살다가 돈으로 자신의 자유와 존재감을 사려는 잘못된 선택으로 스스로를 나락에 빠뜨린다. 남편과 달리 자신을 수단이 아닌 존재로 바라보는 윤민재 역시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이화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데 일조한다.

차정숙은 유이화에 비해 운이 좋은 편이다. 장롱면허라 자조하던 의사 면허지만 어쨌거나 그 면허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할 수 있게 됐고, 미약하나마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아들 정민(송지호)도 있고, ‘라뽀’와 우정과 그 이상의 감정 사이를 애매하게 오가긴 하지만 ‘종이달’의 윤민재와 다르게 정숙에게 든든한 의지가 되는 연하남 로이 킴(민우혁)도 있다. “날 계속 걸어갈 수만 있게 해줘”라는 절절한 호소에도 그를 외면하는 남편 서인호의 존재는 뼈아프지만, 유이화의 남편 최기현도 막상막하, 도긴개긴이니까.

'닥터 차정숙', 사진제공=JTBC'닥터 차정숙', 사진제공=JTBC

그럼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유이화와 역경을 헤치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차정숙의 차이는 전문직 면허의 유무 때문일까? 그 영향도 없진 않을 거다. 유이화에게, 자신의 집안 빚을 갚아준 남편에게 자신의 능력으로 차곡차곡 갚을 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그 오랜 시간을 통제당하며 인형처럼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확히는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보단, 돈 앞에서 얼마만큼 초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두 사람의 처지가 그들의 행보를 결정지었다고 본다.

유이화는 결혼 전 신용카드 회사 인사팀에서 ‘엔젤 나이프’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었으나 기껏(?) 수백 만원 월급 정도가 최선이었을 거다. “내가 너한테 쓴 돈이 수억이다, 주제도 모르는 게”라며 되뇌며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에게 항변하기엔, 남편의 집안이 갚아준 자신의 집안 빚과 부모님의 간병비 등을 빠른 시일안에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을 것. 유이화가 저축은행 VIP 고객들의 눈먼 돈에 손을 댄 건, 돈으로 통제당한 긴 세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반면 차정숙은 전업주부로 살며 자신의 명의로 된 건 휴대폰밖에 없을 만큼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입시 코디가 따로 필요 없을 만큼 자녀들의 과외를 도맡아가며 대를 잇는 부와 명예를 재창조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다. 차정숙의 친정 또한 평범한 서민 가정에 불과하지만 남편 집안의 경제적 시혜를 탐해야 할 만큼 곤궁하지 않다. 유이화와 달리 차정숙이 미미한 표정이나 목소리 톤으로나마 남편에게 일말의 항변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성격 탓도 있지만) 빚이 없다는 심리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입센의 ‘인형의 집’ 이후 많은 사람들이 노라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근현대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루쉰은 한 강연에서 노라의 행보를 두고 굶어죽지 않으려면 몸을 파는 등 타락하거나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경제적 자립을 갖추지 않는다면 집 안이든 집 밖이든 인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소설가 채만식도 소설 ‘인형의 집을 나와서’에서 식민지 조선의 여성 임노라가 집을 뛰쳐나온 뒤 가정교사와 화장품 외판원 등을 전전하다 강간을 당하고 인쇄소 노동자가 되는 모습을 그린 바 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긴 한다. 루카스 네이스의 연극 ‘인형의 집: 파트2’처럼 성공한 작가가 되어 15년 만에 남편과 이혼하려는 노라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대표적이다.

차정숙은 성공적인 2023년의 노라가 될 것이다. 한국 대중매체에서 중년 기혼 여성이 자아를 찾을 때면 꼭 등장하는 잘생기고 능력 있는 연하남의 존재가 못내 거슬리긴 하지만, 먼저 불륜을 저지른 남편의 흠도 있는 데다 장르의 특성상 유이화처럼 불륜이라는 선을 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1화에서부터 거액의 돈을 횡령하고 태국으로 도망친 유이화는 뭇 남성들이 100년 넘게 노라의 부정적 앞날을 예언했던 것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하나의 인간임을 깨닫는 기혼 여성의 앞날을 타락 또는 성장의 양자택일로 그려지는 것이 마음에 차진 않는다. 하지만 유이화는 처음 횡령하던 순간으로 되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할지라도, 더 이상 남편의 집에서 빌트인처럼 살려 하진 않을 것이 자명하다. 장르의 특성상 역경과 고난의 순간마다 구원자를 등장시키며 꽃길 걸을 것으로 보이는 차정숙도, 만약 구원자의 존재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헌신적인 아내이자 며느리의 삶을 다시 걷진 않을 거다. 결과는 타락과 성장으로 단순하게 보일지언정, 그 안에서 두 사람이 오롯이 느끼고 깨닫는 만고의 감정을 응원한다. 한쪽에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한쪽에선 마음 놓고 응원하는 심정으로 ‘종이달’과 ‘닥터 차정숙’을 보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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