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거대한 체스판

머니투데이 구민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2023.04.20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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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교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구민교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


미국 정치학자이자 전략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1997년 출간한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은 당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필독서였다.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독보적 지위를 누리게 됐지만 자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려면 유라시아(유럽과 아시아)라는 거대한 체스판을 전략적으로 잘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패권유지의 핵심전략 도출과정을 일련의 규칙 안에서 서로 속고 속이는 치열한 수싸움이 허용되는 체스게임에 비유한 것이 흥미로웠다.

우리나라 장기의 외통수와 같이 어떤 수를 써도 킹(왕)이 상대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 즉 체크메이트가 되면 게임에서 진다. 민주당계 매파이자 체스게임의 열혈팬이던 브레진스키의 사상을 전격 수용한 이들은 역설적으로 9·11 테러사건 직후 부시행정부에서 권력을 장악한 공화당 네오콘이었다. 덕분에 그는 2017년 작고할 때까지 전쟁광으로 비판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전쟁과 체스는 상대를 이기기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특히 그는 전쟁에서 체스판의 말(기물) 수와 활동성에 해당하는 물리적 군사력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수를 미리 읽는 능력이 승부를 가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국가간 물리적 충돌은 비록 느슨하긴 하지만 민간인과 전쟁포로 보호, 군사적 필요의 원칙, 사용 가능한 무기의 제약 등에 관한 '전시국제법'의 규율을 받는다. 하지만 국가간 첩보전 영역에서는 아군과 적군, 선의와 악의, 인정과 사정 등을 가리는 국제법이나 도덕률은 없다. 대부분 국가의 국내법엔 도감청과 해킹이 불법이지만 국가간 첩보전은 그 수단을 불문하고 상대에게 탄로가 나지 않으면 된다. 설령 들키더라도 첩보원 몇몇이나 특정 기관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는 것 말고는 상대국 정부가 이를 제재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미국의 첩보전 실력은 소련과 경쟁을 통해 일취월장했다. 냉전 당시 '007'로 대표되는 첩보영화가 많이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미션 임파서블' '본' 시리즈 같은 첩보물도 그 연장선에 있다. 영화에서처럼 첩보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아니, 현실세계는 첩보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자국 패권에 위협이 되는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미국을 보라. 사활을 걸고 체크메이트를 피해야 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행마(行馬) 역시 치열하다.



최근 파문이 인 미국 국가안보국의 기밀문서 유출사건은 한 현역 병사의 허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 바람에 자타공인 최강 미국 정보기관은 체면을 단단히 구겼다. 그렇다고 첩보전의 냉혹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미국이 우리 대통령실 관계자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고 섭섭해 하면 지는 거다. 이번 사건을 지난 정부에서 기능이 대폭 약화한 국가정보원과 방첩부대 등 정보기관의 첩보역량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으면 된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유라시아 체스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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