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 시위를 놓는 순간, 나를 넘어섰다 [맨해튼 클래스]

머니투데이 뉴욕=박준식 특파원 2023.03.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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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창작현대무용가 박순호 브레시스컴퍼니 대표

편집자주 세계인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부르는 뉴욕(NYC)과 맨해튼(Manhattan)에 대해 씁니다. 국방비만 일천조를 쓰는 미국과 그 중심의 경제, 문화, 예술, 의식주를 틈나는 대로 써봅니다. '천조국'에서 족적을 남긴 한국인의 분투기도 전합니다.

박순호 대표가 이끄는 브레시스댄스컴퍼니는 지난 24일과 25일 미국 뉴욕 맨해튼 NYU 스커볼센터 초청으로 독립 초연에 나섰다. 이날 브레시스는 유도와 인-균형과 불균형을 선보여 현지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사진=  뉴욕한국문화원 박순호 대표가 이끄는 브레시스댄스컴퍼니는 지난 24일과 25일 미국 뉴욕 맨해튼 NYU 스커볼센터 초청으로 독립 초연에 나섰다. 이날 브레시스는 유도와 인-균형과 불균형을 선보여 현지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사진= 뉴욕한국문화원


활 시위의 고자를 어깨 뒷편으로 끌기 시작하면 말미와 본미가 가까워지는 만큼 탄성의 압력은 거세어진다. 활의 복원력과 궁수의 완력이 맞서는 균형이다.

팽팽히 버티던 시위는 사수의 본능이 신호를 내리면 중지와 검지의 제어가 풀려 마침내 균형이 한쪽으로 무너진다. 그건 긴장이 극점에 머무르는 찰나와 시위를 놓는 순간의 교차다. 반발력이라는 에너지는 그 임계점에서 폭발해 목표점을 향해간다.



무용가 박순호는 천직을 내려놓고 싶었을 때 무심코 이 움직임에 천착했다. 창작이 켜켜이 응축한 스트레스가 정점에 달했을 때 그는 시위 놓는 순간을 골몰했다. 그런데 그게 또다른 해제의 모티브가 됐다. 본디 사냥의 도구였지만 이제 수련의 무예가 된 우리 고유의 사물 하나에서 열쇠를 찾은 것이다.

박순호 브레시스댄스컴퍼니 대표는 "무용가로서, 창작자로서의 삶이 쉽지 않지만 단계마다 도전하면서 희열을 얻었고, 뉴욕 무대에 앞서서는 오히려 창작의 시기에 느꼈던 것보다는 부담이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사진= 박준식 기자 박순호 브레시스댄스컴퍼니 대표는 "무용가로서, 창작자로서의 삶이 쉽지 않지만 단계마다 도전하면서 희열을 얻었고, 뉴욕 무대에 앞서서는 오히려 창작의 시기에 느꼈던 것보다는 부담이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사진= 박준식 기자
지난 23일 만난 박순호 브레시스컴퍼니 대표는 뉴욕 맨하탄 초연을 하루 앞뒀지만 들뜨거나 잘난체 하지 않았다. 내년이면 반백살을 사는 나이지만 마치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사람 몸뚱아리가 가지는 표현의 한계를 부셔온 그 순간순간들을 즐거운 추억으로 얘기했다.



"무용도 어렵고, 무용단을 이끄는 것도 힘든데, 창작은 정말 죽겠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책이나 보자고 활에 대한 걸 읽는데, 시위를 놓는 순간이 참 극적이더군요. '구름다리에 매달린 어린아이가 철봉 첫 칸을 건너갈 때의 찰나', '대나무에 쌓인 눈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저절로 떨어지는 순간' 등이 와닿았어요. 그런 표현들을 보면서 또 한 번 몸짓의 언어로 구체화해보자는 의지가 생겼죠."

유레카 같은 외침으로 석 달 간 고민해 만든 무용이 2014년 11월 국내에서 초연한 <활>이다. 2인무로 탄생한 활은 그가 무용을 사랑하면서도 창작자로 자리를 바꿔 살면서 얼마나 고민했는지 짐짓 알 수 있게 했다. 어거지 안무로 자기기만을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엄격히 대면해온 결과다.

박순호는 "사람은 수많은 잡념과 번뇌를 어느 순간 스스로 놓아야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활>을 만든 2년 후 박순호와 그의 무용단 브레시스컴퍼니는 미국 제이콥스 필로우 댄스페스티벌에 초청돼 세계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코로나19 시기를 지나 6년 여 만에 뉴욕 NYU 스커볼센터 초청으로 25~26일 양일간 <유도>와 <人_조화와 불균형>을 공연해 현지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무용이란 대체 무엇인가
- 문명이 생긴 이래로 사람이 비슷비슷한 주제를 표현하지만 결과물이 다 같진 않다. 문자와 언어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노래나 그림, 영상으로 남길 수도 있다. 내가 하는 것은 사람의 몸짓인데, 개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정서가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환경이나 맥락에 있느냐에 따라 같은 주제라도 다르게 고유하게 발휘된다.

△본인은 타고난 재능인가
- 고교시절 단지 어깨너머로 훔쳐봤던 발레리노의 움직임에 매료돼 뒤늦게 무용수가 됐다. 어머니는 반대하셨지만 아버지께서 해보라고 하셔서 등록한 학원이 마침 발레가 아니라 현대무용을 가르키는 곳이었다. 재능보다는 에너지가 있었고, 새롭고 멋진 무언가에 도전하는 게 좋았다. 남자 무용수가 귀해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후에 네덜란드에 유학한 것은 도전이었고, 그 후에 창작자로 역할을 바꿔 무용단을 이끌면서는 자주 때려치우고 싶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뭐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 배울 때 다리 찢어가면서 했던 것이 본전 생각이 나기도 하고. (웃음)

브레시스댄스컴퍼니 NYU 스커볼 센터 공연 /사진= 뉴욕한국문화원 브레시스댄스컴퍼니 NYU 스커볼 센터 공연 /사진= 뉴욕한국문화원
△그렇지만 이제 문화예술의 도시 뉴욕에 서게 됐다
- 큰 감격이라기 보다는 그냥 관객들 실망하지 않게 잘해야지 그런 생각이다. 힘들 때마다 고비를 이겨낸 생각이 떠오르긴 하는데 약간은 보상받는 느낌이 있긴 하다. 무용을 뒤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무용수일 때는 실력차를 극복해보려고 무리하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창작자로서는 한계를 깨뜨리고 싶어 외딴 나라에서 공부하며 혼자 지내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일련의 과정이 의도한 것도 있었지만 사실 그 시기마다 운이 좋았다. 무용단이 이렇게 해외투어를 다닐 수 있는 것도 이 신(scene)에서 요즘 국제 교류가 활성화된 덕분이다. 뉴욕에서 공연하는 것보단 여기 관객에게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브레시스댄스컴퍼니 NYU 스커볼센터 공연 /사진= 뉴욕한국문화원 브레시스댄스컴퍼니 NYU 스커볼센터 공연 /사진= 뉴욕한국문화원
△첫 공연작 <유도> 소개를
- 스포츠와 무용이 '몸'이라는 매개체로 맞닿은 지점에서 유도가 가진 공격성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유도 선수들의 움직임에서는 마치 동물 같은 공격성을 느낄 수 있었고 그를 현대무용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몸짓을 단순 반복하는 과정에서는 신체의 아름다움보다는 본능이 더 쉽게 드러나는 법이다. 초연은 아프리카 무용수들과 함께 해서 더 거칠었는데, 10여년 만에 우리 무용수들이 좀 더 부드럽게 무용언어화했다.

△둘째 공연 <人_조화와 불균형>은 어떤 내용
- 창작자로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표현 수단이 있는데 상대방에게 변환돼서 전달될 때는 공통분모를 생각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무용은 미적인 부분이 부각되지만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 정보전달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스포츠와 타악 등을 가미해 논버벌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앞으로 추가적인 창작 계획이 있다면
- 미디어의 시대이니 제 어떤 작품이라도 영상과 협업해 만들어보고 싶다. 예컨대 처음의 <활> 작품도 단계별로 영상을 가미하면 전혀 새로운 수준의 시각화 콜라보레이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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