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책상 옆 사진 한장의 기억으로...횡령범 잡은 '현실판 손석구'

머니투데이 김도균 기자 2023.01.23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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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영등포경찰서 112치안종합상황실장

편집자주 한 번 걸리면 끝까지 간다. 한국에서 한 해 검거되는 범죄 사건은 113만건(2021년 기준). 사라진 범죄자를 잡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경찰 베테랑을 만났다.

20일 낮 12시쯤 서울 영등포경찰서. 신동욱(45) 영등포서 112치안종합상황실장./사진=김도균 기자20일 낮 12시쯤 서울 영등포경찰서. 신동욱(45) 영등포서 112치안종합상황실장./사진=김도균 기자


2018년 1월 주과테말라 대한민국 대사관에 40대 한국인 여성 2명이 들어왔다. 한 명은 대사관에 민원 업무를 보러 온 교민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그 친구인 A씨였다. 당시 대사관에서 경찰 주재관으로 근무하던 신동욱 현 영등포경찰서 112치안종합상황실장(45·경정)은 A씨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다고 느꼈다.

신 실장이 책상에 앉아 기억을 더듬던 그때 모니터 옆에 걸어둔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과테말라로 도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범죄자들의 사진 사이로 A씨와 같은 얼굴을 한 사진이 있었다. A씨는 당시로부터 3년전쯤 서울의 한 공장에서 20억을 횡령한 뒤 도주한 여성 피의자였던 것이다.



A씨는 한국에서 횡령 범죄를 저지른 2015년쯤 출국한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다. 범죄 사실이 드러나며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출국한 이력은 있었으나 도착한 국가에서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경찰은 A씨가 자신의 친척이 사는 과테말라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만 했을 뿐이다.

그랬던 A씨가 약 3년만에 신 실장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경찰의 수사권이 미치지 않는 과테말라 땅에서 신 실장은 A씨를 보고도 체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한이 없다고 눈앞의 범죄자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 실장은 먼저 대사관 직원을 불러 A씨 친구에게 주소지를 넌지시 물어보라고 했다. 함께 업무를 보러 온 만큼 멀지 않은 곳에 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 실장은 이후 A씨 남편의 출국 기록을 살펴봤다. 역시 대한민국을 떠난 기록이 있었다. 신 실장은 남편인 B씨도 과테말라에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현지 주소를 조회할 권한도 신 실장에게는 없었다.

그때 신 실장은 운전면허증을 떠올렸다. 신 실장은 B씨 역시 과테말라에 있다면 운전면허증은 교환해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해외로 나간 교민들은 대부분 그 나라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면허를 취득한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발급받는다. 조회해본 결과 B씨는 대사관에서 면허증 서류를 떼간 기록이 있었다. 서류에 기재된 주소는 앞서 확보한 A씨 친구의 주소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곧바로 신 실장은 한국 경찰·법무부에 A씨의 소재가 파악된 사실을 알렸다. 한국 법원은 A씨에 대한 긴급인도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후 신 실장은 임기가 끝나 귀국했지만 법무부는 이 영장을 바탕으로 과테말라 사법 당국의 협조를 얻어 2018년 5월 A씨를 국내로 송환했다.


2017년 당시 주과테말라 대한민국대사관 경찰 주재관(영사)로 근무한 신동욱 영등포경찰서 112치안종합상황실장(45·좌)과 현지 경찰특공대원(우)의 모습./사진=신동욱 경정 제공2017년 당시 주과테말라 대한민국대사관 경찰 주재관(영사)로 근무한 신동욱 영등포경찰서 112치안종합상황실장(45·좌)과 현지 경찰특공대원(우)의 모습./사진=신동욱 경정 제공
현실판 손석구? 1인2역 하는 경찰 주재관
신 실장은 2015년초부터 2018년 2월까지 과테말라에서 경찰 주재관(영사)으로 근무했다. 경찰 주재관은 재외공관의 치안 활동을 보좌하기 위해 외교부로 파견되는 경찰 공무원을 말한다. 현재 세계 33개국에 60여명의 경찰 주재관이 파견돼 활동 중이다.

드라마 '카지노'에 등장하는 필리핀 파견 경찰관 오승훈(손석구 분)은 현지에서 직접 수사를 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특수한 경우다.

필리핀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주재관은 현지 수사권이 없다. 사법권은 각 국가의 고유 권한이어서다. 경찰 주재관에게 주어지는 여권도 외교관 여권이다. 이에 따라 경찰 주재관은 현지 사법 당국의 협조를 얻어내는 외교관의 역할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신 실장은 과테말라 주재관으로 있으면서 치안 환경이 열악한 과테말라에 한국 경찰의 수사기법을 전달하는 '치안 외교관'의 역할을 도맡았다. 2016년 한국 교민이 과테말라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단서가 되는 차량 CCTV(폐쇄회로TV) 영상이 있었지만 화질이 열악해 번호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이를 본 신 실장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 개발한 CCTV 영상 분석 프로그램인 '법영상 3.0' 기증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30만달러 상당의 가치를 지닌 프로그램이었지만 한국 경찰은 과테말라 경찰에 이를 무료로 기증했다. 또 프로그램을 운용할 수 있도록 국과수 연구원을 초청해 강의도 주최했다.

신 실장의 이같은 노력은 과테말라 경찰에게만 도움이 된 것은 아니다. 현지 교민들의 치안 환경을 개선하는데도 일조했다. 앞선 교류를 바탕으로 신 실장은 수도인 과테말라시티 내 코리안 타운의 치안 개선을 유도했다. 코리안 타운을 드나드는 자동차의 번호판을 인식할 수 있는 CCTV를 설치했다. 수배 차량이 이곳을 드나들면 현지 경찰서로 곧바로 알림이 가도록 조치했다.

2018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신 실장은 생활안전과장, 112치안종합상황실장 등 민생 치안을 담당하는 보직을 거쳤다. 과테말라에서의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치안 유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과테말라의 살인범죄율은 2020년 기준 인구 10만명당 17건 수준이었는데 같은 해 한국이 0.7건이었던 것에 비해 30배 가량 높다. 신 실장은 "20m 거리도 선팅이 짙게 된 차를 타고 이동하지 않으면 강도 위험에 노출될 정도"라고 설명했다.

신 실장은 "치안이라는 게 공기랑 같아서 맑을 때는 그 중요성을 모른다"며 "그런데 그 치안이 탁해지면 개인의 삶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신 실장은 민생 치안을 다잡는 경찰로 남고 싶다고 한다. 신 실장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범죄나 대형 사건·사고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신뢰와 감수성을 갖춘 경찰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설 연휴에도 쉬지 않고 근무하는 선·후배 경찰관들이야말로 나보다 더 베테랑"이라며 손사레 쳤다.

2015년 당시 주과테말라 대한민국대사관 경찰 주재관(영사)로 근무한 신동욱 영등포경찰서 112치안종합상황실장(45·오른쪽 두번째)과 현지 경찰청 당시 수뇌부의 모습./사진=신동욱 경정 제공2015년 당시 주과테말라 대한민국대사관 경찰 주재관(영사)로 근무한 신동욱 영등포경찰서 112치안종합상황실장(45·오른쪽 두번째)과 현지 경찰청 당시 수뇌부의 모습./사진=신동욱 경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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