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카지노계의 거물이 된 한국인 차무식(최민식)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디즈니플러스의 신작 '카지노'. 극중 차무식이 20억원의 로비자금을 들여 사업 입찰권을 따낸 칼리즈볼튼 호텔 카지노는 연일 한국인으로 문전성시다. 한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나온 이들이 필리핀으로 몰려든 까닭이다. 드라마에서는 "해외교민 살인사건의 60%가 필리핀에서 벌어진다", "잘 때도 방탄조끼를 입어야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김 전 회장은 한국 검찰과 경찰이 공조한 태국 현지 경찰 이민국 직원들에게 검거됐을 때도 양선길 현 쌍방울그룹 회장과 태국 빠툼타니 소재 골프장에서 여가를 즐기던 중이었다. 남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는 도망자의 삶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황제도피 생활을 해왔다는 얘기다.
경찰청 국외도피사범 송환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1~7월 해외로 도주했다가 검거돼 국내로 송환된 범죄자 203명 가운데 필리핀에 숨어지내던 이들이 56명(27%)으로 가장 많았다.

물가가 싸고 불법 환치기 등을 통해 국내에 있는 자금을 끌어오는 것도 쉬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비교적 덜하다고 한다. 카지노 등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환치기를 통해 자금 조달이 용이하다는 점이 동남아를 범죄자들의 0순위 은신처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현직 검사 B씨는 "몇 년 간 해외로 도주한 피의자를 잡아 생활비 등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를 들여다봤는데 국내와 이어진 동남아 일대의 카지노 등에서 불법 환치기가 횡행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환치기란 통화가 다른 두 나라에 각각 계좌를 개설해 한 곳의 계좌에 돈을 넣고 다른 나라에 만들어놓은 계좌에서 그 나라의 화폐로 빼다 쓰는 불법 외환거래 수법을 의미한다. 한국 계좌에 송금한 뒤 해외에서 현금으로 인출하는 형식이다.
중국이 코로나19 확산 등으로 출입국 시스템을 강화하면서 은신처로서의 이점이 한풀 꺾인 것도 동남아 주가를 띄웠다. 수년 전만 해도 중국으로 배를 타고 밀항하거나 위조 여권으로 입국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밀입국도 어렵고 중국에서 다른 나라로 나가는 것도 어려워져 해외도피 수요가 동남아로 옮겨갔다.
사정기관 관계자들은 동남아에는 필리핀만 해도 7000여개의 섬이 있어 마음 먹고 숨으면 잡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도 동남아가 떴다고 귀띔했다.
익명을 요구한 검찰 출신 법조인 C씨는 "작정하고 해외로 도망가 섬에 숨은 사람을 잡기는 정말 어렵다"며 "불법 환치기 같은 자금줄을 막는 방식으로 압박해 도피 수요를 줄이는 게 대안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