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사진제공=넷플릭스
‘더 글로리’는 고등학교 시절에 끔찍한 학교 폭력을 당한 여성이 가해자들 앞에 나타나 18년 동안 준비한 복수를 실행에 옮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1화는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의 복수 동기를 설명하는 과거 장면이 중심이다. 열여덟의 문동은(정지소)을 집요하고 잔악한 방식으로 괴롭히는 다섯 명의 동갑내기 가해자들과 그런 동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어른들. 이들에게 복수를 결심한 동은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과 등장인물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는 연출, 첫 화부터 쏟아지는 명대사, 차분한 톤으로 시작해 마지막에 전율을 일으키는 송혜교의 내레이션이 2화 시작 버튼을 당장 누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더 글로리', 사진제공=넷플릭스
'더 글로리', 사진제공=넷플릭스
동은이 주여정과 가까워지는 계기도 바둑이고, 연인은 아니고 조력자 사이인 두 사람을 결속시켜 주는 중요한 고리가 바둑이다. 초반 포석에서 멈춘 이들의 대국이 어떤 형국이 될지 기다려진다. 동은이 주여정에게 바둑을 배운 이유가 복수 때문이라는 건 초반에 쉽게 눈치챌 수 있는데, 동은이 목표 대상과 마주 앉아 바둑을 두게 되는 전후 에피소드가 예기치 못한 흥분을 자아내는 구간이다. “바둑은 침묵 속에서 욕망을 드러내고 매혹하고 매혹당하며 서로를 발가벗겨. 상대가 응하지 않으면 그땐 그저 바둑인 거지.” 이 대사를 들으면 바둑이 이렇게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나 자문하게 된다. 심지어 바둑을 배우고 싶어진다. 몰입을 넘어 시청자가 반응하게 만드는 드라마라니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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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에서 송혜교의 연기는 지금껏 보아온 연기와 다른 경지다. 표정, 눈빛, 발성에서 원숙미가 한껏 배어 나온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 살아온 캐릭터를 연기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폐허가 된 인물의 감정 하나하나를 적확하고 흔들림 없이 연기한다. 주인공이 품은 복수심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종종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 현남과 마주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선 오히려 노련한 연기가 두드러진다. 특히 송혜교의 내레이션이 신의 한 수다. 송혜교의 저음으로 발화된 김은숙 작가의 주옥같은 대사들이 귀에 꽂힌다. 동은이 가해자들과 일대일로 벌이는 복수전에서도, 멜로로 전환되는 여정과의 투 쇼트에서도 고도로 계산된 송혜교의 연기가 빛난다.
'더 글로리', 사진제공=넷플릭스
배우들의 연기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수록 시청자는 즐겁게 마련이다. ‘더 글로리’의 출연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가 그렇다. 이도현은 시청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멜로 연기와 캐릭터의 이중성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연기로 후반부 활약을 기대하게 만든다. 가해자들의 리더이자 뼛속까지 악녀인 박연진을 연기한 임지연, 결혼한 박연진을 여전히 좋아하면서 또 다른 욕망을 품는 전재준 역의 박성훈, 목사 딸이라는 ‘빽’을 믿고 방탕하게 사는 이사라 역의 김히어라, 이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어울리는 최혜정 역의 차주영, 허드렛일을 하면서 이들 사이에서도 제일 아래 취급을 받는 손명오 역의 김건우. 2화부터 등장하는 다섯 배우가 저마다 개성 넘치는 악역 연기로 가해자들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든다.
시청자를 울고 웃게 만드는 염혜란의 연기력도 여전하다. 연진의 남편 하도영을 연기한 정성일이야말로 이 드라마를 통해 큰 주목을 받을 것이다. 복수를 위해 자신에게 접근한 동은에게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모습이나 자신을 속인 아내와 동은에게 느낀 배신감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결정타를 놓는 이 배우의 남다른 매력은 ‘배우 정성일의 발견’이라는 확신을 준다. 이밖에도 손숙, 오민애, 김정영 등 베테랑 중견 여성 배우들의 활약이 후반부에서 더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학창 시절의 동은과 연진을 연기한 정지소, 손예은과 여정의 아버지를 살해한 환자 영천으로 분한 이무생의 기막힌 사이코패스 연기도 언급해야만 한다.
'더 글로리', 사진제공=넷플릭스
18세 등급인 만큼 드라마의 수위는 높은 편이다. 1화부터 지속적으로 나오는 학교 폭력 장면이 일부 시청자에겐 진입 장벽이 될 수도 있다. 분명 자극적이지만 자제력을 잃지 않는 안길호 감독의 판단력이 아직까지는 믿음을 준다. 회마다 몰입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연출의 힘이 상당하다. 정주행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만든다. 가해자들을 미행하느라 분주하던 현남이 저녁놀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아버지를 잃은 여정의 심연을 표현한 잠수 장면은 연출의 묘가 빛나는 대목이다. 스릴러 장르의 묘미를 살리는 감독 특유의 연출력은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더 글로리’가 전반부에서 암시한 결말의 도착지는 지옥이고, 증오의 대상들뿐 아니라 시청자들까지 복수의 판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어쩔 것인가. 파트 2가 공개되는 3월까지 두 달을 속절없이 기다릴밖에. 주인공이 ‘망나니 칼춤’을 추겠다고 예고한 복수극이 어떤 우화로 마무리 지어지며 교훈을 남길지 궁금하다.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자극적이고 끔찍할 거야. 막을 수도 없앨 수도 없을 거야.” 이 대사에 열광하며 기꺼이 지옥행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을 끝까지 신명 나게 하기를, 그래서 ‘더 글로리’가 올해의 첫 수작 드라마라는 영광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