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룹 ㅣ 실제역사와 퓨전의 사이에서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2.10.2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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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tvN사진제공=tvN


‘슈룹’은 가상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퓨전 사극이다. ‘조선판 SKY캐슬’이라 불리는 이 드라마는 중전인 화령(김혜수)을 비롯해 왕실의 엄마들(후궁들)의 극성스러운 왕실 교육을 다룬다. 역사 왜곡 논란을 벗어나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퓨전 사극. 그러나 큰 줄기는 실제 역사에서 모티프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슈륩’을 보면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들이 있다. 과연 ‘슈룹’은 그를 얼마나 잘 활용하고 비틀어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낼까?

택현(擇賢)으로 후계자를 고를 수 있나



‘슈룹’에서 현재의 왕 이호(최원영)는 서자 출신이다. 후궁 출신으로 아들을 세자로, 임금으로 만든 대비(김해숙)는 왕실 후궁들의 ‘워너비’. 현재 이호에게는 중전 화령과의 사이에 왕세자(배인혁)를 포함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열 명 가까운 후궁들 사이에서도 제각각 아들을 뒀다. 현재의 왕이 정실의 출생인 대군들을 제치고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왕실 엄마들 사이에서 은밀한 꿈을 꾸게 만드는 요소. 게다가 ‘슈룹’은 첫 화부터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에서 세자와 함께 교육을 받을 배동을 왕자들 사이에서 선발한다고 하여 왕실 엄마들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그런 와중, 세자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어쩌면, 배동이 될 왕자가 세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이 ‘슈룹’ 속 엄마들을 내달리게 한다.

‘슈룹’에서 공공연히 이야기되는 택현(擇賢: 어진 사람을 고른다는 뜻으로, 가장 총민한 자가 후계자가 되는 것)은 조선시대에서 가능한 이야기일까? 조선시대는 철저한 장자 계승, 정확히는 정비인 왕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 계승이 원칙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장자로 왕권을 이어받은 조선의 왕은 8명뿐이다. 그렇다고 택현이 자유자재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장자에게 문제가 있더라도 왕후의 소생이 있다면 차례로 그 다음 순서인 대군들이 후보로 점쳐진다. 조선 3대 왕인 태종이 장자였던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셋째인 충녕대군(세종)을 뽑은 것이 대표적. 세자가 죽었을 때 손자 대신 다른 아들을 후계자로 올리거나 정비의 소생이 없을 경우 등에도 이해관계에 따른 택현은 있었다. 조선 8대 왕 예종은 세조의 차남이었으나 형인 의경세자가 죽은 이후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후계자로 꼽혔고, 효종 또한 형인 소현세자가 죽고 나서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제치고 세자가 되었다. 정비 소생이 없고 후궁 소생만 있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는 서장자인 임해군 대신 영민한 광해군을 세자로 삼기도 했다. 정비와 후궁 모두 자식이 없을 경우 전전대의 후손을 찾아 왕위를 이은 조선 최초의 방계 승통 선조나 왕의 후손이 귀했던 조선시대 후기의 철종이나 고종 때도 대비를 필두로 왕실에서 후계를 택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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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후궁과 승은후궁의 차이

‘슈룹’에서 배동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왕실 엄마들은, 당연히 정비인 화령을 제외하곤 모두 후궁들이다. 이들은 왕의 서장자인 의성군(강찬희)을 낳은 황귀인을 필두로 하는 간택후궁과 궁녀로 일하다 왕의 승은을 입어 보검군(김민기)을 낳은 태소용(김가은)을 필두로 하는 승은후궁으로 라인이 나뉜다.


화령과 함께 간택에 나섰던 영의정 황원형(김의성)의 딸 황귀인은 원래 세자빈으로 내정돼 있었으나 외척을 견제하고자 했던 선왕의 선택으로 한미한 집안 출신인 화령에게 밀려나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왕의 배우자 또는 왕세자의 배우자를 뽑는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지는데, 이때 최종 간택에서 떨어진 처녀들을 후궁으로 뽑는 경우도 있었다. 5대 왕인 단종의 배우자인 정순왕후를 뽑을 때 끝까지 남았던 처자들을 후궁인 숙의로 봉했던 것처럼. 명문가, 최소한 간택령에 처녀단자를 낼 수 있었던 조건의 사대부 집안의 딸이었던 간택후궁은 ‘빈-귀인-소의-숙의-소용-숙용-소원-숙원’로 나뉘는 후궁 품계 중 대체로 4번째 품계인 종2품 숙의로 시작한다.

반면 궁녀 출신인 승은후궁은 왕의 여자가 되어도 특별상궁으로 시작하고, 자녀를 낳아도 종4품인 숙원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 ‘슈룹’에서 승은후궁의 수장 격으로 보이는 태소용이 종3품인 소용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승은후궁으로 한때 중전의 위치까지 오른 장희빈이나 후대에까지 악녀로 묘사된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나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도 있으나 대체로 승은후궁은 존재감은 물론 후계 경쟁에서도 간택후궁의 라이벌이 되기 힘들었다. ‘슈룹’에 종실들의 교육기관인 종학에서 가장 똑똑한 것으로 표현되고 결국 배동으로 뽑히는 인물은 보검군이지만 본격적인 택현이 시작된다면 영의정의 외손자인 황귀인의 아들 의성군과 비교했을 때 출신 성분이나 뒷배가 한참 모자라 고전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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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일으키는 왕자들, 어디까지 봐줄까?

‘슈룹’에서 세자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자 자녀들의 안위를 도모하고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화령은 대군들을 교육시키고자 한다. 세자가 아니더라도 화령의 자식 중 하나가 왕위를 이어야 화령은 물론 대군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전대의 태인세자가 죽은 이후 중전이었던 태인세자의 모친 윤왕후(서이숙)가 폐서인되고 그의 아들들 또한 모두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살해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수준은 아니나 화령의 대군들이 ‘성군의 옥의 티’ ‘실록에 흠집내는 대군들’이란 악명을 살 만큼 왕실의 모범적인 수준은 아니기에 더더욱 최악의 상황을 맞았을 때 그들을 강등할 명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왕자들의 사건사고는 어디까지 봐주었을까? 이는 왕자들의 아버지인 왕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역모 사건을 제외하고는 왕자들의 행패(!)를 봐주었다는 기록이 많다. 그 유명한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갖가지 비행으로 폐세자가 된 이후로도 여러 사고를 쳤으나 왕이 된 동생 세종의 비호 아래 천수를 누렸다. 비행을 일삼은 왕자들로는 선조의 아들들이 단연 눈에 띈다. 서장자인 임해군을 비롯 정원군, 순화군은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은 물론 내키는 대로 여인을 빼앗고, 사람을 해하거나 죽이는 등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선조는 이들을 훈계하거나 처벌하기는커녕 이들의 악행을 고하는 이들에게 벌을 내리는 일이 빈번했다.

‘슈룹’에서 화령의 아들들인 성남대군(문상민)은 재능은 있으나 의지가 없어 학업을 게을리하며 종학의 꼴찌라 하고, 무안대군(문상현)은 수시로 궐밖을 나와 기생과 동침하는 등 바람둥이다. 그러나 이는 왕위를 잇지 못하는 종친에게 있어 흠이 되지 못한다. 그나마 모범적으로 보였던 넷째 계성대군(유선호)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음이 밝혀지는데, 자신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인식하여 남몰래 화장을 하고 여성의 옷을 간직하는 등 당시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행태를 보이는 것. 이를 발견한 화령은 이 사실이 발각되면 계성대군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며 경악한다. 그러나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이자 세종의 며느리였던 순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 사건을 일으키고도 폐서인하여 궁밖으로 내쳤을 뿐 목숨을 거두는 일은 없었다. 하물며 며느리도 아닌 왕자, 왕위와 상관없는 대군인데 기행을 일삼았다고 목숨을 거둘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왕실 엄마들의 교육 경쟁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들고 나온 ‘슈룹’은 지난 10월 23일 4화까지 방영하며 정비의 자식들이 여럿임에도 후궁들의 소생 중 택현할 수 있음을 차근차근 빌드업해 왔다. 이제 세자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쓰러졌고, 본격적인 후계 경쟁에 들어설 전망. 후궁이었던 대비가 전대의 중전과 자식들을 제치고 아들을 왕으로 만든 사연, 세자가 앓고 있는 병이 전대 세자와 같은 병명이라는 사실, 순위대로 보자면 가장 후계에 가까운 성남대군이 왜 어릴 적 평민처럼 사가에서 지내야 했는지 등의 이야기가 차례로 펼쳐지며 흥미를 돋울 예정이다. 실제 역사와는 다른 퓨전 사극이지만 엄연히 원손이 있음에도 죽음 이후 그 자손들이 혹독히 내쳐졌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등 실제 역사와 비교해 볼 만한 요소가 많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과연 화령은 아들들을 지킬 수 있을까? 한 방을 지닌 것으로 보인 성남대군은 형 대신 왕위를 잇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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