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째 '1000원 백반'…"폐지 팔아 먼 길 오는 손님, 가격 올릴 수 없어"

머니투데이 광주=최경민 기자 2022.06.10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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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터뷰 : ZZINTERVIEW]18-①'1000원 백반' 2대째, 김윤경 해뜨는식당 사장

편집자주 '찐'한 삶을 살고 있는 '찐'한 사람들을 인터뷰합니다. 유명한 사람이든, 무명의 사람이든 누구든 '찐'하게 만나겠습니다.

'해뜨는식당'의 김윤경 사장. 벽에 모친 고(故) 김선자 여사의 사진이 걸려있다./사진=최경민 기자'해뜨는식당'의 김윤경 사장. 벽에 모친 고(故) 김선자 여사의 사진이 걸려있다./사진=최경민 기자


'해뜨는식당'에는 오늘도 시래기국이 끓고 있었다.

광주 동구 대인시장에 위치한 곳. '1000원 백반'이 있는 곳. 고(故) 김선자 여사가 2010년부터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1000원 백반'을 팔았던 곳이 '해뜨는식당'이다.

김 여사는 암 투병 끝에 지난 2015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딸인 김윤경 사장(48세)이 대를 이어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점심시간(오전 11시30분~오후 2시) 문을 연다. 일평균 약 100명씩, 주로 노인들이 찾지만 간간이 청년들도 와서 점심밥을 해결하고 간다.



김 사장이 '해뜨는식당'을 운영한 건 어느덧 7년이 넘었다. 모친 보다 '1000원 백반'을 팔아온 기간이 길어진 지 오래다. "식당을 계속 운영해주길 바란다"는 어머니의 유언은 이미 지키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곳의 문을 연다. 가격도 그대로다. 이 고물가 시대에, 아직도 1000원이라니.

김 사장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달 30일 광주로 향했다. '찐터뷰'는 그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해뜨는식당'에서 봉사활동을 마친 후 김 사장과 얘기를 나눴다. 벽면 한쪽 밝게 웃고 있는 김선자 여사의 사진 아래서.



1000원 백반, 가격 인상은 없다
"1000원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다. 가격을 올릴 생각도 없다.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있다."

김 사장은 고물가 시대에 '1000원 백반'을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이같이 말했다. "물가가 장난이 아니다"는 말을 수차례 했지만, "힘들지만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김선자 여사는 '누구나 부담없이 당당하게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금액'을 1000원으로 여겼었다고 한다. '1000원 백반'이 세상에 나온 이유다. 질문을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곡물, 식용유, 야채, 고기 등 가격이 안 오른 품목을 들기 어려워진 혹독한 시대에 대한 질문.


고(故) 김선자 여사/사진=광주MBC 유튜브 캡처고(故) 김선자 여사/사진=광주MBC 유튜브 캡처
- 2010년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1000원과 현재의 1000원의 가치는 너무 다르다.

▶"그렇긴 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지금 편의점에 가도 1000원으로 살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어르신들께는 그 1000원이 엄청나게 큰 돈이다."



- 그게 1000원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인가.

▶"엄마의 뜻도 있지만, 1000원은 말 그대로 딱 한끼의 값이라고 생각한다. 1000원도 없어서 300원을 들고 와 식사를 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에게 2000원, 3000원을 내라고 하면, 그건 2~3일치 밥값이지 않나."

- 그렇다면 1000원은 끝까지 유지하는 것인가.



▶"그렇다. 힘이 닿는 데까지 1000원을 유지할 것이다. 1000원을 유지할 수 없을 때 '해뜨는식당'의 문을 닫는 게 아니다. 내 몸이 더이상 식당 운영을 허락하지 않을 때 문을 닫을 것이다. 어르신들이 폐지를 주워 팔아가지고 우리 식당에 오신다. 광주 지하철 종점에서부터 오신다. 그렇게 매일같이 오신다."

'보험업' 투잡…7년간 매일같이 100인분 밥지어
이런 각오를 가진 김 사장에게 '경제논리'를 들이대며 '1000원 백반'의 미래를 묻는 건 더이상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의 '건강'이다. 김 사장은 그날 일을 하던 중에도 수차례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아침에도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왔었단다.

7년 넘게 혼자서 '1000원 백반'을 팔아오며 '보험업'까지 병행해온 후유증 중 하나다. 그는 '해뜨는식당'을 운영하면서도 그외의 시간에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활동하는 투잡족이었다. '해뜨는식당'의 적자를 '보험업'으로 메운다.



김 사장의 하루 일과는 △아침 6시40분쯤 일어나 보험회사에 출근한 후 △아침 10시부터 '해뜨는식당'에서 일을 시작하고 △오후 3~4시쯤 '해뜨는식당'에서 퇴근한 다음 △늦은 오후 다시 보험회사 업무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보험 고객과의 미팅은 대부분 평일 야간에 진행한다.

광주 '해뜨는식당' /사진=최경민 기자광주 '해뜨는식당' /사진=최경민 기자
김 사장은 "처음에는 음식하는 이모님 두 분을 썼었다. 월급을 150만원씩 드렸었다"며 "그렇게 했더니 내 사비가 한 해에 수천만원씩 빠지게 되더라. 내가 벌어놓은 돈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돈이 없으니까, 이모님들도 짠하게 보더라. 이모님들이 '음식하는 법 가르쳐줄테니 네가 직접 해보라'고 해서 음식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 사장은 혼자 약 100인분의 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찐터뷰'가 찾은 날 '해뜨는식당'의 매출은 8만5000원. 85명 정도가 온 셈이다. 최근 가장 많이 손님이 온 날의 매출은 12만2000원이었다. 100인분에 달하는 무거운 밥솥과 국이 담긴 냄비를 매일 들어야 한다. 허리 숙여 음식을 다듬고, 청소도 날마다 해야 한다.



그는 "피곤하다. 혼자 막 일을 해야 하는 게 진짜 피곤하다"며 "그래서 일요일에 하루종일 몰아서 잔다. 친구들이 불러도 밖에 안 나간다. 그게 건강에 좋지 않은 것도 알지만, 하루종일 잘 수밖에 없다. 가족들이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데, 그게 괜히하는 말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생각했는데, '밥'이 되더라
문을 열수록 적자고, 몸도 축나는 사업. 다시 근원적인 질문이 올라왔다. 왜 이렇게까지 이 일을 하는 것일까.

- 돌아가신 김선자 여사님과 '1000원 백반'에 대한 약속을 하신 건가.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오빠에게는 '딱 3년만 해보고 그만두겠다'고 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겠다' 그랬었다."

- 그랬더니 '밥'이 된 것인가.

▶"뭐 그런거다. 하하. 원래는 음식을 아예 할 줄을 몰랐다."



의외의 발언. '해뜨는식당'의 음식은 굉장히 정갈했고, 맛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담백한 맛의 시래기국이 좋았다. 어르신들이 하도 이 시래기국을 찾아서 아예 '1000원 백반'의 고정 메뉴가 됐을 정도다. 김 사장은 다음처럼 말을 이어갔다.

광주 '해뜨는식당'의 지난달 30일 메뉴 구성. 봉사활동을 끝낸 직후 꿀맛으로 먹었다./사진=최경민 기자광주 '해뜨는식당'의 지난달 30일 메뉴 구성. 봉사활동을 끝낸 직후 꿀맛으로 먹었다./사진=최경민 기자
"내가 원래는 대학에서 유아교육학을 전공했고,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음식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매일 100인분씩 만드니까 음식맛이 괜찮아졌다. 그래도 아직 잘 모른다. 나물 같은 거 무칠 때 뭘 넣어야 하는지 같은 건 포털에서 검색해본다. 예전에 우리 식당에서 일 하셨던 이모님들께도 물어봐서 '몇 분 삶아라, 양념 뭐 넣어라'하면 그대로 따라한다."

시래기국에 대해서는 "뭐 다른 거 하는 게 없는데"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짜고, 맵고 이런 거 못먹는데, 어르신들도 내 입맛에 길들여졌다. 다른 식당에 가서 음식을 못먹겠다고 하시더라"며 웃었다.



'문을 열수록 적자고, 몸도 축나는 사업'일 뿐만 아니라 △'원래는 하나도 할 줄 몰랐던 일'이자 △'여전히 배우고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일을 끌고 나가는 원동력을 물으니 '주변의 도움'을 거론한다.

김치와 장아찌, 그리고 김과 같은 기본 반찬들은 시장 상인들이 주로 기부해준다. 가스비는 한 공기업 사장이 자신의 사비로 내주고 있다고 한다. 냉장고, 집기 등은 대기업의 지원이 있었다. '해뜨는식당' 벽에 보니 방송을 보고 기부 물품과 함께 편지를 보낸 재미동포의 사연도 있다. 인근 대학생들이 봉사활동을 와서 김 사장의 짐을 덜어주기도 한다. 김 사장이 다니는 보험회사는 '해뜨는식당' 업무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면서도, 식당의 리모델링도 해줬다고.

그는 "나도 내 혼자 힘으로는 이걸 유지 못한다. 주변에서 주시는 대로, 그리고 들어오는 대로 하고 있다"며 "막 힘들고 그럴 때, 필요한 게 있으면 (기부 등으로) 또 채워지더라. 필요한 게 있으면 또 채워진다"고 말했다. "너무 많이 들어오면 어린이센터, 고아원 이런 곳에 보낸다. 유통기한도 있는데, 내가 그걸 다 갖고 있어봤자다"는 말도 더했다.



고물가에도 "더 좋은 반찬 못해드려 마음아파"
아무리 기부가 잇따르고 있어도 상식적으로 '1000원 백반'은 수지타산이 나오기 어렵다. 이 대목에 굳이 많은 설명이 필요치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고물가 시대가 덮쳤다. 그만큼 '해뜨는식당'은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김윤경 '해뜨는식당' 사장이 콩을 삶고 있다. 다음날 반찬이 콩자반이었다./사진=최경민 기자 지난달 30일 김윤경 '해뜨는식당' 사장이 콩을 삶고 있다. 다음날 반찬이 콩자반이었다./사진=최경민 기자
김 사장은 "돼지고기를 이전에 6만원 어치 사면 100인분 요리를 만들 정도가 됐는데, 지금은 10만원 이상 사야 한다"며 "계란 가격은 한 번 올라가더니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지금 계란 한 판에 8000원 정도한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더 좋은 반찬을 못해드리는 게 마음이 좀 그렇다. 고기 반찬도 더 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손님들에게 고기 반찬도 내야 하는데, 물가가 하늘로 치솟아서 난처한 상황이라는 것.

이 어려운 시절에 '1000원 백반'을 팔면서 지나치게 의연한 태도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이미 오른 물가를 내가 내려달라고 하면, 내려지나"라며 미소를 보인다.



'돈'이 아니라 '몸'이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1000원 백반'을 유지하겠다는 고집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오는, 형편이 어려운 100여명의 손님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나눠주고 싶은 마음. 모친부터 시작된 '운명'에 따른 일이라기에는, 김 사장의 그 '고집'이 워낙 확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문을 닫은 후 정산을 하던 김 사장은 어르신들이 '1000원 지폐' 대신 놓고 간 동전들을 한 움큼 지며 환하게 웃었다.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이걸 봐보세요, 이걸 봐요. 될 수 있으면 좋은 거 해드려야지."



동전은 500원, 100원 짜리는 물론 10원, 50원 짜리도 있었다.
지난달 30일 '해뜨는식당'에 어르신들이 놓고 간 동전. 10원짜리도 있다./사진=최경민 기자지난달 30일 '해뜨는식당'에 어르신들이 놓고 간 동전. 10원짜리도 있다./사진=최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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