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 초고속 정상화 이룬 두산의 결기

머니투데이 김성은 기자 2022.03.11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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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126년 명가 두산이 다시 뛴다④

편집자주 두산그룹이 다시 뛴다. 핵심 계열사인 두산중공업이 최단기간 채권단 관리를 졸업한데 이어 그룹 차원의 M&A도 재가동에 들어갔다. 차기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원전을 비롯, 신재생에너지, 가스터빈, 수소까지 완벽한 에너지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췄다는 평가도 나온다. 1896년 '박승직 상점'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최고(最古) 기업, 두산의 행보에 재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 초고속 정상화 이룬 두산의 결기


"노사 상호신뢰 기반하에 최선의 협조로 신속한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 정상화를 빨리 이루는 것이고 지역회생과 기업회생을 돕는 것이다."

지난해 9월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상호신뢰'의 원칙은 채권자와 채무자는 물론 모든 이해관계자에 통용된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은 두산중공업 채권단 관리가 조기에 끝날 수 있었던 가장 주효한 한 가지로 이 부분을 꼽았다. 산은이 견지해왔던 구조조정의 3대 원칙인 △대주주의 책임있는 역할 △이해 관계자의 고통분담 △지속가능한 정상화 방안 등에서 두산 측은 진정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2020년 3월 두산중공업이 산업은행 기업금융실 문을 두드렸을 당시만 하더라도 두산중공업의 재무 상황은 '중환자'에 비견될 정도로 심각했다.



2014년 당기순손실로 돌아서 7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는데 그 규모만 총 3조5000억원이 넘었다. 2019년 말 기준 순차입금은 4조9000억원, 부채비율은 243.3%에 달했다.

국제사회가 탈석탄 움직임을 보이면서 GE, 지멘스 등 내로라하는 발전 관련 기업들이 수주 타격을 입었는데 두산중공업도 이를 피하지 못했다. 때마침 닥쳤던 코로나19(COVID-19) 위기는 시장 유동성을 경색시켰고 두산중공업 역시 단기채 차환길이 막히면서 국책은행에 긴급지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실사를 거쳐 자금지원이 이뤄졌겠지만 절차를 따지다간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두산중공업에 대해 회계법인의 실사 완료 전 1조8000억원이 우선 지원됐고 실사 후 1조2000억원이 추가로 투입됐다.


산업은행은 적기 신속한 문제 해결을 위해 기존 기업금융실 담당 인력을 포함한 구조조정본부에 일을 맡겼고 과거 금호타이어, 조선사 구조조정을 맡았던 '에이스' 인력들도 불러 모았다. 두산 측도 회장을 비롯 임원 급여반납, (주)두산과 오너 일가 주식 담보를 제공했다.

국책은행의 이같은 지원 결정에는 두산중공업이 국내 에너지공급 근간이 되는 발전설비사업의 중추였다는 점도 고려가 된 것으로 풀이된다.

무엇보다 두산 측은 자구안 마련에 시간을 끌지 않았다. 두산그룹이 직접 '뼈를 깎는 자세'라고 언급할 정도의 고강도 재무개선계획안을 내놨는데 노사 진통을 감내한 구조조정은 물론 증자, 자산매각 등 할 수 있는 노력은 모두 포함시켰다. 모두 3조원 규모였다. 4월부터 채권단과 논의를 시작해 6월 초 최종 확정됐다. 특히 두산솔루스, 두산인프라코어 등은 알짜 매물이었다.

재계에서는 이같은 두산의 결단을 두고 고(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걸레론'이 또 한 번 회자됐다. 외환위기가 불어닥쳤던 1990년대 후반 "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라며 지론을 갖고 알짜기업이던 OB맥주 등 식음료사업을 매각, 기업을 지켰다. 이는 전화위복으로 두산그룹이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 기업으로 변신·존속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재무구조 개선을 통해 두산중공업도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한 채권단 관계자는 "100년을 넘긴 국내 최장수 기업의 저력이 여기서 나오는 듯 했다"며 "과거 OB맥주, 삼화왕관 등을 매각했을 때처럼 기업을 살리기 위한 결단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이해관계자들이 제각각 목소리를 내고 해당 기업과 오너 일가가 손에 쥔 것을 놓는 것을 주저해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시장 심리가 급속도로 악화돼 손 쓸 수조차 없어진다는 점을 두산은 잘 알고 있었다"며 "조기에 단호한 결정을 내려서 시장에 신뢰를 준 영향이 컸고 따라서 두산중공업 구조조정은 사실상 초반 3개월에 윤곽을 다 잡은 셈"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두산중공업은 8년 만에 당기순이익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순차입금은 3조9000억원으로 낮아졌고 부채비율은 171.6%로 떨어졌다. 한국기업평가는 두산중공업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로 올렸고 등급전망도 '안정적'으로 제시했다.

두산은 지난 2월 말 채권단과 두산그룹간 체결했던 재무구조 개선약정에 의한 채권단 관리체제를 졸업했다. 국책은행 문을 두드려 긴급자금을 지원요청한지 23개월 만이다. 산은과 수은이 적기에 신속·과감하게 지원했고 기업은 자구노력을 성실히 이행, 짧은 기간에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모범 사례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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