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주판 선배와 엑셀 후배

머니투데이 이윤학 BNK자산운용 대표이사 2022.02.23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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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대표이윤학 대표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것도 몰라요?" 30년 전 이맘때 내가 첫 직장에서 들은 가장 가슴 아팠던 말이다. 그 시절 금융회사의 여직원은 대부분 고졸이었다. 남자 직원도 절반 이상이 상업고를 나온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신입사원 시절 나보다 어린 선배님이 꽤나 많았다. 나이는 한 살 어린데 입사 7년차인 선배 여사원도 있었고 세 살 어린 남자 선배사원도 있던 시절이다. 나이 중심의 연공서열화된 조직에 자연히 어색한 관계가 형성됐다. 어린 동생뻘에게 업무를 배워야 하고 나이 많은 오빠에게 업무를 지시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요즘처럼 직무중심, 능력중심, 양성평등의 세상에서는 이상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1990년대 초 남자 중심에 나이를 중시한, 전통적 위계질서가 강한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이상한 관계였다.

그 무렵 새로운 업무혁명의 바람이 불어왔다. 바로 PC 보급이다. 처음엔 부서당 1대가 지급되더니 얼마 후 3대, 5대 결국 1인 1PC 세상이 열렸다. 문서작성 능력과 편집에 탁월한 워드프로세서-아래한글, MS워드와 같은-세상이 열렸지만 그동안 타자기에 익숙했던 직원들이 문제였다. 재빨리 워드프로세서를 배워야 했지만 타자기에 너무 익숙해 타자실력은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매우 힘들어했고 심지어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의 큰 줄기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워드프로세서를 거부하거나 늦게 배운 직원들은 업무숙련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후 다시 몇 년이 지나 또한번의 업무혁명이 왔다. 엑셀과 같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이 도입된 것이다. 수치계산, 통계, 도표를 만들어야 하던 사무직원들에게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실제로 당시 내가 엑셀로 작성한 복잡한 수식의 통계표를 나의 상사는 책상서랍에서 주판을 꺼내 한참을 검산하고선 "이 어려운 통계를 어찌 이리 빨리했나" 하던 웃지 못할 추억도 있다. 그 이후에도 PPT와 같은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이 새롭게 도입되고 결국 밀레니엄을 맞이할 무렵 전 국민 인터넷 시대가 열리기도 했다. 10여년 전에는 모바일 혁명이 불었고 이제는 가상공간을 넘나드는 메타버스까지, 모든 사람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심에 서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끝까지 타자를 고수한 여직원, 주판으로 엑셀표를 검산하던 부장님은 그 시절 최고의 인재였다. 입사할 무렵 타자를 분당 몇백 타를 쳤고 주산 몇 단쯤은 됐기에 특채된 분들이다. 다만 그들은 '현행화'(現行化)에 실패한 것이다. 현행화는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 지속적으로 '현재'에 맞게 적응하는 것이다. 말이 쉬워 현행화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혹자는 '현재를 유지하는 게 혁신'이라고 했다. 즉 지속적으로 시대에 맞게 업데이트(update)하는 것 자체가 혁신이라는 의미다. 코닥이 카메라시장을 현행화하지 못해 사라졌고 모바일 시장을 업데이트하지 못한 노키아는 실패했지만 구글은 검색시장을, 아마존은 상품시장을 현행화해 성공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현행화는 무엇일까. 초등학생도 한다는 코딩을 배우는 것도, 인사이트를 키우기 위해 책을 읽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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