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우리가 인종주의자들의 나라였다니"

머니투데이 이상배 경제부장 2022.02.21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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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왼쪽)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 사진=뉴시스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왼쪽)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 사진=뉴시스


#1. 2016년 11월8일 미국 뉴욕. 전형적인 민주당 지지층인 미 동부의 젊은 중산층 남녀 5명이 모여 대선 개표 방송을 보고 있다. 당초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낙승을 기대하며 들떴던 이들은 개표가 진행될수록 점점 침울한 분위기로 빠져든다.

결국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개표가 일단락되자 한 여성이 충격에 빠져 읊조리듯 말한다. "맙소사, 우리 미국은 인종주의자들의 나라였어." 그러자 옆에 있던 흑인이 그걸 이제 알았냐는듯 비꼰다. "맙소사, 그거 노예였던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했던 말인데."



2016년 미 대선 직후 미국 지상파 NBC의 코미디쇼 SNL(Saturday Night Live)에 방송된 장면이다.

그해 미국 대선은 한마디로 백인 노동자들의 승리였다. 트럼프는 시종일관 불법 이민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긴 블루칼라 백인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성공했다. 중남미 이민자도 포용해야 한다며 힐러리가 내세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란 가치는 트럼프가 부추긴 '증오' 앞에서 힘을 잃었다.



미국이 유색인종의 나라가 되고, 내 자녀가 비주류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백인들의 '공포'도 한몫했다. 2007년 이후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백인은 절반이 안 된다. 현재 미 전역의 초등학생 중에 히스패닉, 흑인, 아시안 등 유색인종이 백인보다 더 많다는 얘기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불법 이민자들을 쫓아내겠다는 트럼프에게 백인들이 남 몰래 열광한 이유다. 트럼프의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가 사실은 '미국을 다시 하얗게'(Make America White Again)를 의미하는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2. 선거는 기본적으로 욕망의 대결이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모든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 자리를 놓고 벌이는 대선은 그 결정판이다. 각 집단이 욕망을 '가치'로 포장한 채 몇년마다 대회전을 벌이는 게 대선이다.


하지만 2022년 대한민국의 대선은 유독 노골적이다. 검찰총장 출신의 야권 유력후보는 집권 전부터 현 정부에 대한 수사를 공언했다. '정치보복'이란 비판이 일었지만 열성 지지자들은 속으로 환호했다. 애당초 그걸 기대하고 그 후보를 밀었으니까.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야권 지지층의 욕망은 한마디로 집권 세력에 대한 '응징'이다. 한 야권 경선후보가 조국 전 민정수석 가족에 대한 수사가 지나쳤다고 말했다가 지지율이 급락한 게 이런 정서를 말해준다.

표를 얻기 위해 '증오'를 활용하는 건 여당 후보도 마찬가지다. 우리 영해를 침범해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을 격침해야 한다고 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의 편파 판정과 한복 논란으로 국내에서 반중 정서가 높아진 것과 과연 무관했을까.

#3. "인간은 석기 시대의 정서, 중세의 제도, 신과 같은 기술을 갖고 21세기에 들어섰다." '현대의 찰스 다윈'으로 불린 위대한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36시간 내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는 시대지만, 인간의 본성은 약 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사피엔스가 처음 출연한 이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른 집단을 경계하고 백안시하고 증오하는 '트라이벌리즘'(Tribalism·부족주의)은 인류 역사상 단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이다. 대니얼 골드하겐 하버드대 교수는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의 배경을 독일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내면화된 '절멸주의적 반(反)유대주의'에서 찾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증오의 정치'는 늘 힘을 발휘했다. 정치보복과 선제공격, 혐오적 외교가 위험하다는 교훈은 쉽게 무시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게 지금까지 호모사피엔스가 보여준 본성이다. 과연 이번 대선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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