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부르카 벗고 운전대 쥔 여성···사우디 변화의 키 '비전 2030'

머니투데이 리야드(사우디)=김도현 기자 2022.02.04 11:08
글자크기
LEAP 2022 행사장에서 차도르를 착용한 채 전시된 자동차 게임을 즐기는 사우디 여성들 /사진=김도현 기자LEAP 2022 행사장에서 차도르를 착용한 채 전시된 자동차 게임을 즐기는 사우디 여성들 /사진=김도현 기자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기술 전문 박람회 'LEAP 2022'가 열린 사우디 리야드 프론트 컨벤션센터(RFECC) 주변은 행사 기간인 1~3일(현지시간) 사흘 내내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리야드 시내에서 공항까지 연결된 고속도로 인근의 RFECC로 진입하려는 차량이 몰린 결과였다. 한국을 포함한 해외 취재진을 태운 버스도 진출입로에서 상당 시간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체증이 끝나길 기다리며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릴 때마다 눈길을 끄는 3가지 광경이 있었다. 중동 최고의 원유 부국이라는 이미지를 깨는 장면이랄까. 영화 속에서처럼 중동의 거리에는 '슈퍼카'라 불리는 고급 자동차가 흔할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슈퍼카를 보긴 쉽지 않았다. 거리를 지나는 자동차 중 상당수가 현대차·기아 브랜드라는 점도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제네시스 브랜드도 많이 보였다.



이슬람 문화권이라는 고착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바라볼 때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운전대를 잡은 이들 중에 히잡이나 차도르를 쓴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우디에 도착한 날 숙소 가는 길에서 본 G80 운전자도, RFECC 진입로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정면을 응시한 팰리세이드 운전자도 모두 여성이었다. 행사장 주변에서 많은 여성 운전자들이 도로를 누비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의 전통복장은 크게 히잡, 차도르, 니캅, 부르카 등으로 구분된다. 히잡은 머리와 목만 가리는 스카프 형태다. 차도르는 얼굴 노출은 가능하지만 목을 포함한 전신을 가리는 의상이다. 니캅은 눈만 내놓는 의상이고 부르카는 이마저도 가리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의상이다. 사우디 여성들은 그동안 니캅을 주로 착용했다. 엄격한 가풍을 자랑하는 집안의 여식들은 주로 부르카를 착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지에서 목격한 현재 상황은 그동안 알려진 것과 전혀 달랐다. 여성들은 마스크로 입과 코 주위를 가렸을 뿐 얼굴 내놓기를 꺼리지 않은 눈치였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여성도 있었다. 극단적인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인 주변 중동 국가 여성들과 달리 사우디 여성들은 자유롭게 운전하고 공공장소를 활보했다.

이런 광경은 불과 몇 년 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초 사우디 여성들은 남성 없이 홀로 거리를 거닐거나 공공장소에 방문할 수 없었다. 이슬람 율법으로 금기됐던 행동이었다. 여성의 운전은 법적으로 금지됐고 면허조차 취득할 수 없었다.

사우디 여성들의 운전이 가능해진 것은 2017년이다. 이듬해부터 여성들의 운전면허증 취득이 가능해졌다.


STC 부스에서 근무하는 한 사우디 여성이 관람객들에 자사의 기술을 소개하는 모습 /사진=김도현 기자STC 부스에서 근무하는 한 사우디 여성이 관람객들에 자사의 기술을 소개하는 모습 /사진=김도현 기자
1980년대부터 여성들의 영화관람·콘서트 등 공공장소 출입을 제한했던 규제도 속속 폐지됐다. 표면적으로는 사회 풍속을 단속한다지만 여성들의 외부활동을 제한해온 종교경찰의 권한도 대폭 축소됐다. 종교경찰의 체포권도 약화됐다.

변화의 시작은 2016년 4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발표한 '비전 2030'이었다. 사우디 정부가 의욕적으로 준비한 'LEAP 2022'도 2030년까지 석유산업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비전 2030'의 일환으로 열린 행사다. 비전 2030은 경제정책에 국한된 프로젝트가 아니라 정치·사회 전반의 개혁활동이라는 게 사우디 정부의 설명이다. △활기찬 사회 △번영하는 경제 △진취적인 국가라는 3대 슬로건 아래 국민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폭넓은 사회 변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변화의 물줄기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보였다. LEAP 2022 행사장에서도 관람객들에게 자사의 기술력을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여성들과 삼삼오오 모여 전시장 구석구석을 찾는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많진 않지만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도 볼 수 있었다.

여성의 사회활동 확대를 허용하기 시작한 사우디의 변화는 새로운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지하자원이 아닌 기술 중심의 산업구조와 2060년 탄소중립을 위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데 자유로운 사고가 정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 정부 관계자도 사우디 사회의 변화가 중장기적인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해석했다.

나와프 D 알호샨 사우디 정보통신부 테크 부문 차관은 "비전 2030이 시행된 뒤 정보통신 분야에서만 전체 석유 의존도를 6% 낮추는 성과를 거뒀다"며 "젊은 인재들이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알호샨 차관은 또 "정부의 역할은 투자를 통해 인재들에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기술의 진화는 결국 자유로운 사고와 혁신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