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과학이 자본이 되는 시대

머니투데이 최연구 (과학문화칼럼니스트·럭스로보 고문) 2021.11.23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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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구 과학문화칼럼니스트최연구 과학문화칼럼니스트


얼마 전 국립중앙과학관이 주최한 국제과학관심포지엄(ISSM)의 주제는 '과학자본'(Science capital)이었다. 과학관이 자본을 주제로 내건 것도 놀랍지만 과학이 자본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참신하기까지 하다. 자본은 장사나 사업의 기본이 되는 돈이다. 말 그대로 자본이 근본인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본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기조강연을 맡은 런던대학교 루이스 아처 교수는 어릴 때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과학자를 꿈꾸는 경우는 적다면서 이른바 '과학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과학자본은 과학과 관련된 지식, 환경, 경험, 관계 등을 총칭한다. 과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 과학적 소양, 과학적 태도나 가치, 학교 교육 이외 과학 관련 경험, 가정에서 과학적 분위기 등을 들 수 있다. 가령 과학친화적 가정환경, 과학관에서 과학체험, 전문적인 과학지식 등은 과학자본 형성을 가능하게 해주며, 주변에 알고 지내는 과학자가 많은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발표자 메간 에네스 박사는 공동체의 문화적 자산을 강조하면서 사회자본, 열망자본, 언어자본, 가족자본, 탐색자본 등 다양한 가능성을 언급했다.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것은 사회자본이고 가족, 친족이 공유하는 기억은 가족자본이며 꿈과 목표를 갖는 것은 열망자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여러 분야를 탐색하는 것은 열망자본, 외국어를 잘하는 것은 언어자본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자본 개념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와 문화자본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화사회학자이자 당대 최고 석학으로 손꼽히던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은 획기적이었다.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두 축은 노동과 자본인데 자본 소유 여부에 따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양대 계급이 형성된다. 원래 자본은 재화나 용역을 생산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는 데 사용되는 자산이나 생산수단을 의미하는 경제 개념이었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자본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고 경제 영역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른바 문화자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은 3가지 형태의 자산으로 나눠진다. 첫째는 체화된 문화자산인데 이는 경험과 학습 등을 통해 체득해 몸에 밴 것을 말한다. 고상한 취향, 품위나 감성, 심미안, 고급지식이나 기술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는 객체화한 문화자산으로 보유·소장하고 있는 물건이다. 문화상품. 골동품, 소장예술품 등 문화적 대상물을 가리킨다. 셋째는 제도화한 문화자산이다. 졸업장, 학위, 자격증 등 공식적 교육과정, 제도, 절차를 거쳐 얻는 공인된 자격을 말한다. 이 셋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체화된 문화자산이다. 고상한 취향이나 고급지식은 일시적, 선천적으로 획득되는 게 아니며 가정환경, 사회적 관계 속에서 교육을 통해 천천히 체득되므로 형성과정이 쉽지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예컨대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자라온 환경, 전문교육, 투자된 시간과 돈 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을 과학에 적용한 것이 바로 과학자본이다.

오랜기간 과학을 탐구하고 체험하면서 과학지식을 익히고 과학적 태도나 증거기반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관점을 체득하는 것, 어릴 때부터 과학관을 자주 다니고 과학캠프나 과학축제에 참여한 경험, 부모나 친인척 중 이공계 출신이나 과학자가 많은 가정환경 등은 모두 과학자본의 밑거름이다. 과학자본이 많은 개인은 과학자로 성장하거나 과학기술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과학자본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하다. 과학자본은 과학문화를 만들고 기술창업을 촉진하며 연구·개발과 과학기술 지속발전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과학은 자본이 되고 돈을 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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