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12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반도체 공급망 확충을 논의하는 화상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뉴스1
미국 백악관이 23일(현지시간) 반도체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글로벌 주요 기업을 소집한 회의에서 삼성전자 등 반도체 제조업체에 재고와 주문·판매내역 등 내부정보를 요구한 것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정부가 세계 각국의 민간기업에 줄서기를 강요하는 것을 넘어 기업 기밀까지 요구하면서 시장 개입을 예고했다는 점에서다.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공식적인 입장을 자제하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정보 제출 시한으로 제시한 오는 11월 초까지 업계의 고민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18일(현지시간) 미시간주 디어본의 포드 전기차 공장을 방문했다. /AFP=뉴스1
지난해 말부터 불거진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으로 전세계 자동차업계에서는 9개월 이상 생산 차질이 이어지고 있다. 포드, GM(제너럴모터스) 등 미국 자동차업체 역시 올해 내내 공장 가동과 중단을 되풀이하면서 미국 정부의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이면엔 반도체시장 재편 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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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미국 정부의 정보 제출 요구가 단순히 시장 수급 불균형 해소에 그치지 않고 미국 주도의 시장 재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반도체가 산업을 넘어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로 부상하면서 반도체 패권주의와 동맹론을 내세운 미국 정부가 전세계적인 공급난을 직접 조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것부터 그렇다.
특히 1급 영업기밀에 해당하는 재고 현황과 판매 내역은 외부에 알려질 경우 고객사와의 가격 협상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 데다 경쟁사에 마케팅 전략이 노출될 수 있어 공시로도 밝히지 않는 내용이다.
업계 한 인사는 "바이든 정부가 표면적으로는 공급난 해소를 내세우지만 이런 정보를 요구한 것 자체가 또다른 노림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시장 개입"이라며 "향후 삼성전자가 미국 기업과 반도체 판매 계약을 맺을 때 미국 정부가 삼성의 정보를 이용해 협상에 개입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시법까지 동원 가능성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지난 5월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미 상무부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행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 페이스북) /뉴스1
러몬도 장관은 이날 인터뷰에서 "기업들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수단이 있다"며 "거기까지 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야 한다면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와 관련, 미국 정부가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동원해 기업의 정보 제출을 강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방물자생산법은 냉전시대 군수조달 목적으로 만들어진 법이다. 이번 사안에 대한 미국 정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업들이 백악관의 요구를 무리수로 평가하면서도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눈치보기에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노골적인 美 중심 패권주의에 기업들 난감
전세계 반도체 생산력의 75%가 한국과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에 집중돼 있고 이런 글로벌 분업 체제가 미국의 경제·안보적 취약성을 만들었다는 미국반도체산업협회의 분석이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산업 정책과 맞닿아있다.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선 반도체 패권 확보가 필수라는 게 바이든 정부의 기본 인식이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언론 브리핑에서 "반도체 문제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내내 최우선 순위 과제"라고 밝혔다. 러몬도 장관은 "근본적인 해결책은 우리가 반도체칩을 미국에서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왜곡 최소화 수준에서 대책 마련해야"
삼성전자 텍사스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 /사진제공=삼성전자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시간이 남은 만큼 미국의 의도와 의지를 좀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정보를 제출하더라도 시장에 왜곡된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제출이나 관리가 이뤄져야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