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중년의 직장보고서, ‘미치지 않고서야’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1.07.0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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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문소리, 중년직장인들의 비애 담아

'미치지 않고서야', 사진제공=MBC'미치지 않고서야', 사진제공=MBC


1만 시간의 법칙.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즘 들어서는 이 법칙에 갑론을박이 있지만 어쨌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전문가 비슷 정도는 된다는 개념이다. 이 법칙을 직장인에게 대입하면? 주 5일 동안 하루 5시간만 자기 업무에 매진해도 1년 52주면 1300시간, 8년이면 1만 시간이 넘는다. 회사에서 꽉 찬 대리급 정도다.

그럼 10년을 넘어 20년 정도면 어마어마한 전문가로 대접받겠네? 현실은 글쎄. 희망퇴직 신청서나 안 받으면 다행이다. MBC 수목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극본 정도윤, 연출 최정인)가 그리는 n년차 직장인들의 현실이 그렇다. 전문가는 전문가인데, 발에 맞지 않는 신발 혹은 맞지 않는 부품 취급이다.

‘미치지 않고서야’는 사업부 매각을 앞두고 희망퇴직 면담을 하는 한 중년남자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고3 아들과 중3 딸을 뒀다는 이 남자에게 회사가 제안하는 것은 2년치 연봉(기본급 기준)과 위로금 3,000만 원. 나가지 않고 버틴다면 복직 투쟁만 최소 몇 년은 걸릴 거란 인사 담당자의 상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에 비해 주인공 최반석(정재영)의 처지는 좀 낫다. 해외 근무처에서 일하는 조건이지만 헤드헌터의 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회사에서도 창인시 생활가전사업부 세탁기팀 프로젝트 리더로 발령을 냈다. 2001년 한명전자에 입사해 20년 넘게 개발자로 일하며 하드웨어 관련 특허 보유 건수만 72건인 A등급 개발자이기에 겨우 살아남은 거다. 그러나 오늘 살아남았다고 회사가 자신을 대우해주는 것이 아님을 최반석은 안다. 기껏해야 3년에서 5년 정도 연장된 것이리라는 짐작한다. 관리자를 마다하고 실무 업무를 원하는 것도, 언젠가 회사를 나가야할 때를 대비해서일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진제공=MBC'미치지 않고서야', 사진제공=MBC

회사는 최반석을 잔류시켰지만 옮겨진 사업부에서 최반석을 대하는 기류는 애매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로 44세인 수석(부장급) 개발자 최반석이 배정된 팀은 37세인 한세권(이상엽)이 팀장을 맡은 로봇청소기 팀. 작년에 식기세척기 100만대 판매 신화를 달성한 한세권은 한명전자 사장과 8촌지간인 자칭 ‘로열패밀리’에, 3,250만 원짜리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스펙 좋은 ‘엄친아’다. 최연소로 개발1팀 팀장이 될 만큼 실력이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잘난 척과 오만함도 ‘넘사벽’. 창인공업전문대학 출신이지만 자신보다 나이도, ‘짬바’도 많은 최반석이 우습기도, 거슬리기도 할 터다. 이는 비단 한세권만의 입장은 아니다. 같은 팀의 책임(과장급)이나 선임(대리급) 모두 나이 많은 아저씨 최반석이 어느 정도 부담스럽다.

첫날 점심도 함께하지 않을 만큼. ‘미치지 않고서야’는 이처럼 직장에서 내리막길에서 선 직장인들의 모습을 담는다. 예전 같으면 부장님 소리 들으며 어느 정도 대우받았을 연차의 최반석, 그리고 최반석과 대학 동문이자 회사 동료인 노병국(안내상), 팽수곤(박원상), 공정필(박성근) 등은 그들끼리 뭉쳐 점심을 먹을 만큼 젊은 친구들에게 은근히 배척당하는 아저씨 신세다. “애들이 우리랑 밥 먹기 싫대, 부담스럽다고.”

물론 ‘미치지 않고서야’가 중년 아저씨들의 푸념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20년 넘게 쌓은 실력도 사내정치와 ‘윗선’의 심기 앞에선 허망한 가랑잎에 불과하다는 비정한 사실을 ‘미치지 않고서야’는 보여준다. 자신이 몇 개월간 끙끙거리며 만든 로봇청소기의 오류를 간단한 부품 교체로 잡아내는 최반석에게 심기가 뒤틀린 한세권이, 일부러 시연회에서 부품을 갈아 끼워 오작동을 보이곤 반석의 잘못으로 덮어씌우는 장면을 보라. ‘우리 팀에 맞지 않는 부품’ 같다며 최반석을 자신의 전부인인 당자영(문소리)이 팀장으로 부임하는 인사팀으로 내쫓는 것도 가능하다. 최반석이 인사팀의 업무를 1도 몰라도, 회사의 윗선이 한세권을 더 중요시 여기는 이상 그 발령은 더 이상 이상한 것이 아닌 게 된다.

이런 현실은 여유로운 듯 보이는 한세권에게도 동일하다. 한명전자 사장 한승기(조복래)는 매출 실적 하위 30%의 제품은 생산을 중단할 것이라는 청천벽력의 메시지를 천명했다. 한세권이 이끄는 로봇청소기 팀과 노병국이 이끄는 무선청소기 팀 중 하나는 없어질 것이란 명령도 하달됐다. 이 모든 건 다 한 마디로 정리된다. “이거 다 위에서 내려온 거야.”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수많은 직장인들의 말도 최반석의 말과 같을 것이다. “제가 뭐 힘이 있나요. 회사에서 까라면 까야죠.”

'미치지 않고서야', 사진제공=MBC'미치지 않고서야', 사진제공=MBC
3화에서 모터 구동팀 팀장 강민구(이삼우)가 개발2팀 선임 정성은(김윤서)에게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큰소리를 내지르는 에피소드에서도 회사의 비정한 힘의 논리를 엿볼 수 있다. ‘실력은 좋지만 사람은 영~’이라는 평가를 받는 강민구는 이직을 앞둔 상황이라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사과할 수 없다며 배짱을 부리는 인물. 그러나 사업부 매각을 앞두고 핵심 인재를 최대한 붙잡아야 하는 인사팀장 당자영 입장에선 실력 있는 강민구를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팀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 강민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 노병국 팀장 또한 ‘강민구는 왜 하필 이럴 때 사고를 치냐’고 혀를 찰 뿐, 후배인 정성은의 다친 마음보다는 강민구와의 관계 개선에 더 급급해한다. 노병국의 무심함을 탓하고 싶다가도 옴쭉달싹 못하는 중간관리자의 비애를 생각하면 또 서글퍼진다. 조직 생활 좀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비슷한 풍경을 목격했으리라.

레전드 오피스물 ‘미생’의 장그래 같은 청년들에겐 적어도 앞으로 나아지리라는, 젊음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들에겐 완생(完生)을 꿈꿔볼 시간이 충분하다. 그러나 최반석에게 회사가 건넬 희망은 ‘희망퇴직 신청서’일 가능성이 높다. 이 비릿한 씁쓸함을, ‘웃픈’ 현실을 ‘미치지 않고서야’는 무겁지 않은 터치로 건드린다. 정재영, 문소리, 안내상, 박원상, 박성근 등 연기 고수들의 ‘짬바’와 전작 ‘마녀법정’에서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유쾌한 분위기를 잃지 않은 정도윤 작가의 극본이 잘 어우러지는 분위기다. 앞으로 그려낼 이야기에 더욱 궁금증이 일 정도로.

다만 20~30대 젊은층의 시선에는 얼핏 재미없는 ‘고인물’ ‘꼰대’들의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극중 최반석의 말처럼 ‘뒤통수 치는’ 드라마는 안 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다. 90년대생을 이해하려는 중년세대의 몸부림까지는 아니어도, 이 드라마를 보며 중년에게도 그들의 사정이 있음을 좀 들어봐 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중년은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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