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부회장의 명함과 말(馬), 그리고 합병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1.06.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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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가 판다/삼성물산 합병 재판 7대 쟁점 분석](5)말이 시기적으로 합병 뇌물이 아닌 이유



자본시장법 등의 위반 혐의로 진행되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재판에서도 승마지원이 합병의 대가인지를 두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측과 검찰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 부회장은 앞선 국정농단 재판에서 '포괄적 승계'를 위한 '묵시적 청탁'의 대가로 말 등을 뇌물로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미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번 재판에서 승마지원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뇌물이 되려면 사전에 합병을 도와달라는 부정한 청탁이 있고 그 대가로 말을 뇌물로 제공해야 한다. 순서상 청탁이 있은 후에 뇌물이 제공되고 그 후에 청탁이 이뤄지거나, 청탁 후 일이 끝나고 뇌물이 제공되는 게 순서인데, 이미 확정된 선행 국정농단 재판의 결과로 보면 이 순서가 맞지 않다.



지난 1월 18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재용 부회장 등)의 주장과 같이 피고인들이 2015년 7월 25일 단독면담(2차) 이전부터 정유라에 대한 승마지원을 계획한 것이 아니어서 원심의 사실인정에 일부 잘못이 있다...(후략)"고 판시했다.

"삼성이 승마협회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다"며 임원 교체를 요구한 박 전 대통령의 질책이 있었던 2차 단독면담(2015년 7월 25일) 이전에는 삼성이 정유라에 대한 승마지원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는 게 당시 재판부의 판단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양사의 주주총회에서의 합병승인은 그보다 8일 앞선 2015년 7월 17일이었다. 합병이 끝난 뒤 승마지원에 대한 압박이 이루어져 순서상 말이 합병청탁의 대가가 아니라는 의미다. 이같은 파기환송심 확정판결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위해 말을 매개로 한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는 검찰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18일 오후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리는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재수감됐다./사진=이기범 기자 leekb@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18일 오후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리는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재수감됐다./사진=이기범 기자 leekb@


'5분'의 1차 독대로는 시간이 부족했던 '합병 청탁'
검찰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재판 관련 공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2014년 9월 15일 대구 소재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 과정에서 부정한 청탁과 뇌물 약속이 오갔다고 주장했다.

이날 이 부회장은 대통령으로부터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를 삼성그룹이 맡아주고, 승마 유망주들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좋은 말도 사주는 등 적극 지원해달라'는 취지로 대통령의 지인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 대한 승마지원을 요구받았다고 검찰은 공소장에 적시했다.


검찰과 변호인 측 둘다 '승마협회 회장사를 삼성이 맡으라'는 박 전 대통령의 요구가 이날 있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정유라에 대한 지원 요구와 경영권 승계지원의 청탁이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은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 테이프 커팅을 앞둔 5분간의 짧은 시간 동안 승계에 대한 청탁과 정유라에 대한 말 지원 등의 뇌물 합의가 이뤄지기는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2014년 9월 15일 오전 대구 무역회관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 확대 출범식에 참석해 삼성과 벤처기업 간 계약 체결식을 지켜본 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벤처기업 대표들, 권영진 대구시장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청와대 제공) 2014.9.15/뉴스1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2014년 9월 15일 오전 대구 무역회관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 확대 출범식에 참석해 삼성과 벤처기업 간 계약 체결식을 지켜본 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벤처기업 대표들, 권영진 대구시장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청와대 제공) 2014.9.15/뉴스1
앞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당시 5분의 짧은 면담 시간에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의 건강 상태나 행사 준비 상황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부정한 청탁에 합의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변호인 측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장시간 이야기할 수 있었던 '0차 독대'가 있었다고 항소심 재판 말미에 공소장을 변경했었다. 그 '0차 독대' 날이 2014년 9월 15일 '1차 독대'에 앞서 사흘전인 9월 12일 금요일이다.

새로 등장한 '0차 독대'의 빈틈
특검은 '0차 독대'의 증거로 안봉근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비서관의 증언,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의 보좌관이었던 김건훈 전 청와대 행정관의 문건 등을 들었다.

안봉근 전 비서관은 특검조사에서 '2014년 하반기 어느 날'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단독면담이 있었고, 그 때 이 부회장을 처음 만나서 이 부회장의 명함에서 휴대전화번호를 받아 이를 저장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자신의 명함에는 휴대전화번호가 없으며, 0차 독대가 있었다면 그걸 기억 못하는 자신은 치매"라고 강하게 항변했다. 이 부회장은 자신의 휴대전화번호가 자주 바뀌어 명함에는 기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이 부회장의 명함(사진 참조, 전무시절 명함 포함)에는 사무실 전화번호와 이메일과 주소 등이 기재돼 있지만 휴대전화번호는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명함 앞뒤와 전무 시절의 명함 앞뒤. 이 부회장은 자신의 전화번호가 자주 바뀌어 명함에는 휴대폰 번호를 넣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실제 명함에는 사무실 번호만 있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명함 앞뒤와 전무 시절의 명함 앞뒤. 이 부회장은 자신의 전화번호가 자주 바뀌어 명함에는 휴대폰 번호를 넣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실제 명함에는 사무실 번호만 있다.
안 전 비서관은 변호인 측의 증인신문에서 "명함에 휴대전화번호가 있는 것을 정확히 기억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답해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졌다.

안 전 비서관은 또 이 부회장을 '2014년 하반기'에 그 때 한차례 인사할 기회가 있었을 뿐 그 후에는 한번도 인사할 기회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는 사흘 후인 9월 15일에도 이 부회장을 만났고, 앞서 2014년 6월 박 전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 일정 당시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을 방문 때와 2014년 7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 방문, 2014년 9월 하순 박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에도 이 부회장을 만나는 등 4차례 더 만날 기회가 있어 그의 증언에 무게감이 떨어졌다.

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 2018.7.5/뉴스1  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 2018.7.5/뉴스1
특검이 9월 12일을 '0차 단독면담' 시기로 특정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의 보좌관이었던 김건훈 전 청와대 행정관이 작성한 '대기업 등 주요 논의 일지' 문건 때문이었다. 이 문건에는 9월 12일 삼성, 15일 롯데(?) 등으로 적혀있었다.

이는 김 전 행정관의 기억에 의존한 기록이었는데, 당시 안종범의 수첩에는 12일 김창근 SK그룹 부회장·김영태 SK그룹 사장·김용환 현대차그룹 부회장 등의 이름이 적혀 있고, 삼성 측 관계자의 이름은 없어 수석과 행정관의 기록이 서로 달랐다.

또 김 전 행정관의 기록에 있는 롯데와 포스코 총수들의 면담 일자에는 실제 면담을 하지 않았고, 두산 오너의 대통령 면담 시기를 2014년 10월 15일에는 박 전 대통령이 이탈리아 해외순방 중이었다. 이 부정확한 기록에 대해 법원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이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2014년 9월 12일 박 전 대통령의 일정을 보면 오전 오후가 빽빽하게 짜여 있어서 굳이 그날 총수 면담을 했을지 의문이 든다는 게 변호인 측의 주장이다.

2014년 9월 12일 청와대 오전 일정에는 신임 주한대사들로부터 신임장을 제정받는 행사가 있었고, 또 오후에는 퇴임 대법관 근조훈장 서훈 및 신임 대법관 임명장 수여식, 뒤 이어 1군 사령관 보직신고 등의 일정이 있었다고 한다. 삼청동 안가와 청와대를 오가며 면담을 할 정도로 여유 있는 일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정 속에 사흘 뒤에 만날 이 부회장을 따로 불러서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는 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게 변호인 측 주장이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9월 12일 '0차 단독면담'가 있었다는 것은 입증이 안돼 해당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무죄 사유가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2차 독대에서의 질책과 승마지원...합병과는 무관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을 위한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가 열린 2015년 7월 17일 오전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이 총회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을 위한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가 열린 2015년 7월 17일 오전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이 총회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말이 포괄적승계의 대가일지 모르지만, 개별적 현안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대가는 아니라는 게 변호인 측의 주장이다. 형사소송법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in dubio pro reo)' 판결하라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다.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단독면담 2차는 2015년 7월 17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이 주주총회를 통과한 8일 후인 2015년 7월 25일이다. 이날 박 전 대통령은 이 부회장에게 조속한 승마 지원과 최서원의 조카 장시호가 운영하는 한국통계스포츠영제센터에 대한 후원을 요구했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이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승마협회에 대한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심하게 질책을 받은 당시 상황에 대한 특검 조사에서 "대통령 눈빛이 레이저 같았다"거나 "여자분한테 그렇게 싫은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라는 말로 당초 정유라에 대한 말 지원에 대해 알지 못했음을 항변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밝힌 "2015년 7월 25일 단독면담(2차) 이전부터 정유라에 대한 승마지원을 계획한 것이 아니다'는 내용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부정한 청탁으로 규정하고, 그 대가로 말을 지원했다는 검찰의 주장과는 큰 차이가 난다.

'0차 독대'와 관련해서도 법원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부회장이 2014년 9월 12일 박 전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하였다거나, 그 자리에서 승마지원에 의한 뇌물공여의 약속을 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 측이 합병을 대가로 말을 지원하기로 했다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라며 "합병승인이 된 이후에도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아 혼이 났다는 것은 합병과 말 지원이 무관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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