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재구성] '제주판 살인의 추억'…부검의 추정 사망시간이 달랐다

뉴스1 제공 2020.12.15 06:06
글자크기

유력 용의자 검거했지만…직접증거 없고 정황증거만
1·2심 무죄 선고…피고인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서울=뉴스1) 이세현 기자
© News1© News1


(서울=뉴스1) 이세현 기자 = 2009년 2월8일, 평화롭던 제주도가 발칵 뒤집혔다.

일주일 전 실종됐던 어린이집 보육교사 이모씨(당시 27)가 애월읍 고내봉 인근 배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씨의 옷이 일부 벗겨져 있었고 목이 졸린 흔적이 있는 등 범죄에 연루된 정황도 발견됐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곧바로 택시기사 박모씨를 유력 용의자로 특정해 조사했다.

그러나 금방 해결될 것 같았던 이 사건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미제로 남으며 '제주판 살인의 추억'이라 불리게 됐다.



◇경찰, '수상한 정황' 택시기사 용의자로 특정

이씨는 2009년 2월1일 새벽 동창모임에 참석하고 친구들과 헤어진 후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다투고 남자친구 집에서 나온 이후 실종됐다.

이씨는 1일 오전 3시쯤 콜센터에 택시 배차여부를 문의했다가 대기중인 택시가 없다는 답변을 듣고 전화를 끊었고, 다시 114로 전화를 걸었다가 1초 만에 전화를 종료했다.


이씨의 휴대폰은 당일 새벽 4시쯤 꺼진 것이 확인됐고, 이씨의 소지품이 들어있는 가방은 닷새 후인 6일 오후 제주시 아라2동의 한 농로변 돌담 아래 숲속에서 물에 젖은 채로 발견됐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8일 이씨는 숨진 채 발견됐다. 하의 일부는 벗겨져 있었고 손에는 범인과 몸싸움을 한 듯한 상처가 남아있었다.

경찰은 범인이 성범죄를 시도했으나 이씨의 저항으로 실패하자 이씨를 살해해 유기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이씨가 택시를 타려고 문의했던 점 등으로 볼 때 근처를 지나던 택시에 탄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은 제주지역 택시기사 5000여명을 전수조사해 박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했다.

박씨가 운전한 택시는 당일 새벽 피해자의 남자친구 집에서 피해자의 집까지 가는 최적 운행경로에 설치된 차량번호판독기를 통과했다. 또 박씨가 사용하던 휴대전화의 통화내역 중 사건 전날과 당일의 통화내역 전체가 삭제돼 있었다.

박씨는 자신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자 교제하고 있던 여성을 시켜 자신의 숙소를 정리하도록 시키고 갑자기 제주도를 떠나 서울, 부산 등에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채 생활하기도 했다.

◇부검의 "이씨 24시간 이내 사망" 수사 '올스톱'…동물실험으로 반전

그러나 이씨를 부검한 부검의가 이씨의 사망시각을 이씨가 발견된 2009년 2월 8일 오후 1시50분쯤부터 24시간 이내로 추정하면서 박씨에 대한 수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부검의는 검안당시 이씨의 직장체온이 현장 주변 온도보다 더 높고, 내부 장기의 부패가 전혀 진행되지 않은 점 등을 이유로 이씨가 발견시점 하루 전인 7일 이후 사망했다고 판단했다.

경찰은 이씨가 실종 당일인 1일 사망했다는 전제로 수사를 진행했으나, 부검의 소견은 경찰의 입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사건은 장기미제로 남았다.

지난 2015년 일명 '태완이법' 이후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이를 계기로 제주경찰은 2016년 재수사에 착수했다.

재수사에서는 이전 수사의 가장 문제였던 이씨의 사망추정 시간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동물실험이 진행됐다.

국내 법의학계 권위자인 이정빈 가천대 석좌교수 주관으로 제주경찰은 물론 전북청 과학수사계, 경찰수사연구원 등 전국의 과학수사요원들이 실험에 참여했다.

실험에는 55~70㎏ 상당의 돼지 4마리와 10~12㎏의 비글 3마리를 사용했다.

수사팀은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이씨가 입었던 무스탕을 동물에 동일하게 입혀 실험을 진행했고, 그 결과 배수로 등 주변환경의 특수성으로 인해 동물 사체의 온도가 기온보다 낮아졌다 다시 높아지는 이상현상과 부패가 현지히 지연되는 현상을 확인했다.

경찰은 또 박씨의 택시 트렁크와 뒷좌석 바닥에서 이씨가 입었던 무스탕 털과 유사한 동물털을 검출하고, 이씨의 치마와 가방에서 이씨의 청바지에 포함된 파란색 면섬유와 유사한 섬유를 발견했다. 택시의 트렁크, 조수석 시트에서도 이씨가 당일 입었던 치마와 유사한 모섬유가 검출됐다.

이씨의 사망시각을 2009년 2월1일 실종당시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경찰은 박씨를 구속하고 2019년 1월 기소했다.

◇1,2심 무죄 선고…박씨 "국가배상 소송할 것"

다 해결된 줄 알았던 사건은 법정에서 다시 한 번 반전을 맞는다. 이씨에게 1·2심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지난해 7월 제주지법은 피해자가 박씨가 아닌 제3자가 운전한 차량이나 택시에 탑승했을 가능성을 합리적인 의심 없이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박씨와 피해자에게서 각각 검출된 미세섬유를 두 사람이 접촉했다는 유력근거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피해자의 신체에서 박씨의 옷을 구성하는 섬유가 검출된 것과 박씨의 차량에서 피해자의 옷과 유사한 미세섬유가 검출된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이 같은 감정결과는 '유사'한 섬유가 검출되었다는 것이고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법원은 또 경찰이 박씨의 청바지를 입수하는 과정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제대로 발부받지 않았다며 위법수집 증거로 보고, 청바지에서 검출한 미세섬유 증거 및 분석결과에 대해서는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사건 당일 박씨의 알리바이에 대한 진술에 틀린 점이 있거나 수사과정에서 행적에서 불리한 정황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박씨를 이씨를 살해한 범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 무죄로 판단했다.

2심을 맡은 광주고법도 1심의 무죄 판단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박씨의 택시에서 나온 섬유가 피해자의 옷에서 나온 섬유와 유사하기는 해도 대량생산되는 섬유의 특성상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동물실험결과에 대해서도 "과학적 실험결과에는 오류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정확성을 검증할 수 있도록 일정량 이상의 데이터가 수집될 필요가 있다"며 "이 사건 동물실험결과는 단 1회의 실험결과만이 존재하므로 결과값의 정확성을 검증하기 어렵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박씨는 항소심 선고 후 취재진과 만나 "(검찰과 경찰이) 원하는 답변을 들으려 강압적으로 대했다"며 향후 판결이 확정되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박씨에 대한 상고심은 진행 중이며, 그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