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잡으면 농사는 무엇으로 짓나[오동희의 思見]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0.11.2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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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되물림 논란이 일고 있는 기업승계 상속세 문제는 돈(화폐, 자본)의 성격을 규정짓는 문제다.

돈은 필요한 상품을 사서 욕구를 만족시키는 ‘사용가치’와, 그 돈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아 화폐를 버는 자본으로 성격이 나뉜다. 이런 얘기를 하면 “돈이면 다 같은 돈이지 돈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공격이 바로 나온다.

돈의 성격을 2000여년 전부터 우리와 함께 한 한우를 소재로 한 연극을 통해 설명해 볼까 한다.



극작가 동랑 유치진의 1934년 작품 ‘소(牛)’는 주인공 ‘국서’ 가족의 유일한 재산인 소 한마리를 두고 벌이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소를 팔아 장가를 가려는 큰 아들과 몰래 팔아 한몫 챙기려는 둘째 아들, 밀린 소작료를 받기 위해 소를 차지하려는 지주의 마름과 ‘절대 소만은 내줄 수 없다’는 주인공 국서가 등장한다.



당시 사회를 비판한 이 작품으로 유치진 선생은 일제 경찰에 잡혀 구속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경제시스템의 기본인 농경사회에서 ‘소’가 갖는 노동력과 자본, 화폐의 상징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누구에게 소는 팔아서 돈이 되는 화폐이자, 맛있는 먹거리에 불과하지만, 국서에게는 올 한해 농사를 잘 짓기 위한 노동력이자 자본이다. 새끼를 낳는다면 또 다른 추가자본을 생산하는 자식 같은 존재다.

이를 철학적으로 얘기한 인물들이 정치학의 아리스토텔레스나,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자본론의 칼 마르크스 등이다.


이들은 화폐를 상품 구매를 위한 단순 사용가치로서의 화폐와 상품생산을 위한 자본으로서의 화폐로 구분했다.

사용가치로서의 화폐는 욕구충족을 위한 화폐로 소비 후 더 이상 가치를 증식하지 못하고 퇴장화폐가 된다, 하지만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상품생산을 통해 가치를 생산한다는 게 얘기의 핵심이다. 쉽게 말해 ‘돈이라고 다 같은 돈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소를 도축해 그 고기를 먹으면 그 돈의 효능은 먹는 만족감 이후 사라지게 된다. 반면 돈을 들여 소를 사서 그 소로 논이나 밭을 갈아서 곡식을 생산해 이를 팔면 그 소를 산 돈은 증식하는 자본이 된다는 얘기다.

약 18조원의 주식 등 유산을 남기고 영면한 고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사용가치로서의 돈은 일부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자본으로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는 주식이었다. 이 회장의 지분이 국서의 소처럼 삼성전자라는 논밭을 일궈 시가총액 430여조원(보통주·우선주 포함)의 기업을 일군 것이다.

정부는 대대로 농사를 짓지 말고, 국서의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처럼 경작할 소를 팔아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내라고 하니 기업가 입장에선 당혹스러운 일이다.

창고에 있는 곡식(물려받는 현금이나 동산)은 몰라도 내년에 농사 지을 씨앗과 소(주식지분)를 팔아서라도 상속세를 내라는 것은 국가 경제 전체를 볼 때도 고민해볼 문제다.

일각에선 “삼성이 상속세를 내겠다는데 니들이 왜 부자들 상속세 문제를 걱정하느냐”는 비아냥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빈부 간 계급투쟁의 문제도 공정한 부의 재분배 문제도 아니다. 경제학에서의 자본의 성격과 이를 기반으로 한 과세의 문제다.

외국 정부에서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득세를 도입하는 이유가 그들이 바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소작할 논밭을 잘 아는 국서네는 소가 없으면 농사를 못 짓는다.

가업승계 지분은 소를 물려받는 것과 같다. 누구는 그 소를 나눠서 맛있는 1등급 고기로 구워 먹자고 하지만, 그러면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잠깐 욕구를 충족하고 화폐의 가치는 사라진다.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하면 그때 그 소를 잡든지, 구워먹든지 알아서 할 일이다. 지금은 소를 잘 키우고 논밭을 잘 가꿀 수 있는 환경이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그래서 기업승계 때는 주식 지분만이라도 상속세 대신 지분매각시 세금을 걷는 자본이득세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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