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K-배터리' 소송 판결까지 35일을 보내는 방법

머니투데이 김성은 기자 2020.11.05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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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한국전자산업대전이 개막할 때다. 당시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현 삼성전자 상임고문)이 여러 부스를 둘러보던 중 LG전자 전시장을 찾아 꼼꼼히 살피더니 LG전자 최신 스마트폰 V20 재생 음악을 직접 감상했다. 그는 즉석에서 경쟁사 제품을 "좋네"라고 가감없이 평가해 여러 차례 기사화됐다.

당시 기사엔 담지 못한 뒷얘기가 하나 있다. 동료 기자들과 만든 채팅방에서 그래도 권 부회장이 경쟁사 부스를 찾아 관심 있게 제품을 들여다 본 것이 외국폰이 많이 팔리는 것보다는 한결 낫지 않느냐는 반응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국뽕스럽게' 느껴질 수 있어도 당시 채팅방에서 권 부회장의 행보는 긍정적이라는 목소리가 대다수였다.



2020년 10월, 인터배터리 행사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가 LG화학 부스를 찾은 것이다. 지 대표는 당시 경쟁사 제품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권 고문과의 사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소송으로 인해 단순 경쟁을 넘어 더 살벌한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 대표의 LG화학 부스 방문은 더 관심을 끌었다. 지 대표는 이날 기자들로부터 소송전에 대한 질문을 받고 "K-배터리 산업을 위해 빨리 해결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답했다.



국내 배터리업계를 대표하는 양사이자 글로벌 배터리업계의 선두주자군에 속하는 양사가 법적 공방을 벌인 지 벌써 1년6개월이다. 소송전을 지켜본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K-배터리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엄혹한 업계 상황 속에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성장할 수 있는데, 어떻게 K-배터리 협업이 가능하냐는 논리다. 무엇보다 영업비밀 침해에 관한 문제라면 'K-배터리'는 더더욱 설 자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흔히 2차전지가 '포스트 반도체'로 성장할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단순히 LG화학이나 SK이노베이션 같은 기업들이 앞으로 삼성전자에 버금가는 수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하나의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국내에서 수많은 장비를 쓰고, 수많은 부품 회사들과 협업해야 하는 것처럼 앞으로 K-배터리도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배터리가 '미래 먹거리'란 말은 그래서 단순히 들리지 않는다.

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0 그린뉴딜 엑스포'를 찾은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는 기자에게 직접 K-배터리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입장을 전했다.


지 대표는 "국내 전기차 배터리 3사가 해외에서 활발히 투자 중"이라며 "2025년이 되면 이들 3사의 생산능력이 360GW(기가와트)에서 400GW(기가와트)까지 급격히 커지는데 이렇게 되면 배터리 회사들이 투자하는 장비, 소재, 부품 회사들의 매출 추정치는 35조~50조원까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한국형 소·부·장 부흥을 배터리 3사가 이끌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이 자국산과 외국산에 대해 차별적인 보조금 정책을 쓰면서 자국 배터리 산업을 키우는 데다 유럽과 미국도 노골적으로 아시아 견제에 나서는 상황에서 K-배터리는 엄청난 저항을 맞을 수 있다. 그만큼 배터리 사업은 단순히 2~3개 기업의 사활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서로 경쟁사라고 하지만 무수히 많은 중소기업들을 육성하고, 이들을 위한 펀드를 조성하며, 턱없이 부족한 국내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등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정부와 K-배터리 3사가 머리를 맞대야 할 부분이 있다.

K-배터리를 위해 영업비밀을 희생하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분명히 영업비밀 침해 여부를 가려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송 중'이라는 이유로 이 부분에 대해 속시원하게 양사가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진 못했다.

LG화학은 "30년 노하우가 담긴 지식재산권이 중요하며, (영업비밀을) 훔쳐간 쪽에서 무엇을 훔쳐갔는지 더 잘 알 것"이라고 주장한다. SK이노베이션도 "배터리 제조 기술이 다 다른데 어떤 영업비밀을 어떻게, 얼마나 침해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며 맞서고 있다. 양사로부터 관련 비공개 자료들을 모두 넘겨 받은 것으로 알려진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소송의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판결을 두 번씩이나 미뤘다.

12월10일. ITC로부터 최종 판결이 나온 뒤에도 양사는 국내외에서 기나긴 법적 싸움을 이어갈 수 있다. 수 천억원의 소송비용은 1조원 이상 늘어날 수 있고, 모든 소송이 끝나기까지 3년이 걸릴지, 5년이 걸릴지 누구도 알 수 없다. ITC는 일단 영업비밀 침해와는 별개로 이뤄지고 있는 양사간 특허침해 소송 판결일을 2021년 11월30일로 정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양사 모두 합의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점이다. 판결일까지는 이제 35일(11월5일~12월9일) 남았다. 어찌보면 ITC가 양사는 물론 한국 정부와 산업계에게 다시 한번 심도있게 들여다보라고 시간을 준 것일 수 있다.

더 원만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 지을 순 없는 지 모두가 손을 맞잡아야 할 때다. 더욱이 바이든 후보가 미국 대선 당선이 유력시되며 신재생에너지 인프라에 2조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그의 공약이 실현되면 K-배터리가 지금과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기자수첩]'K-배터리' 소송 판결까지 35일을 보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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