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기사엔 담지 못한 뒷얘기가 하나 있다. 동료 기자들과 만든 채팅방에서 그래도 권 부회장이 경쟁사 부스를 찾아 관심 있게 제품을 들여다 본 것이 외국폰이 많이 팔리는 것보다는 한결 낫지 않느냐는 반응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국뽕스럽게' 느껴질 수 있어도 당시 채팅방에서 권 부회장의 행보는 긍정적이라는 목소리가 대다수였다.
권 고문과의 사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소송으로 인해 단순 경쟁을 넘어 더 살벌한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 대표의 LG화학 부스 방문은 더 관심을 끌었다. 지 대표는 이날 기자들로부터 소송전에 대한 질문을 받고 "K-배터리 산업을 위해 빨리 해결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답했다.
흔히 2차전지가 '포스트 반도체'로 성장할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단순히 LG화학이나 SK이노베이션 같은 기업들이 앞으로 삼성전자에 버금가는 수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하나의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국내에서 수많은 장비를 쓰고, 수많은 부품 회사들과 협업해야 하는 것처럼 앞으로 K-배터리도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배터리가 '미래 먹거리'란 말은 그래서 단순히 들리지 않는다.
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0 그린뉴딜 엑스포'를 찾은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는 기자에게 직접 K-배터리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입장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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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대표는 "국내 전기차 배터리 3사가 해외에서 활발히 투자 중"이라며 "2025년이 되면 이들 3사의 생산능력이 360GW(기가와트)에서 400GW(기가와트)까지 급격히 커지는데 이렇게 되면 배터리 회사들이 투자하는 장비, 소재, 부품 회사들의 매출 추정치는 35조~50조원까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한국형 소·부·장 부흥을 배터리 3사가 이끌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이 자국산과 외국산에 대해 차별적인 보조금 정책을 쓰면서 자국 배터리 산업을 키우는 데다 유럽과 미국도 노골적으로 아시아 견제에 나서는 상황에서 K-배터리는 엄청난 저항을 맞을 수 있다. 그만큼 배터리 사업은 단순히 2~3개 기업의 사활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서로 경쟁사라고 하지만 무수히 많은 중소기업들을 육성하고, 이들을 위한 펀드를 조성하며, 턱없이 부족한 국내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등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정부와 K-배터리 3사가 머리를 맞대야 할 부분이 있다.
K-배터리를 위해 영업비밀을 희생하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분명히 영업비밀 침해 여부를 가려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송 중'이라는 이유로 이 부분에 대해 속시원하게 양사가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진 못했다.
LG화학은 "30년 노하우가 담긴 지식재산권이 중요하며, (영업비밀을) 훔쳐간 쪽에서 무엇을 훔쳐갔는지 더 잘 알 것"이라고 주장한다. SK이노베이션도 "배터리 제조 기술이 다 다른데 어떤 영업비밀을 어떻게, 얼마나 침해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며 맞서고 있다. 양사로부터 관련 비공개 자료들을 모두 넘겨 받은 것으로 알려진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소송의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판결을 두 번씩이나 미뤘다.
12월10일. ITC로부터 최종 판결이 나온 뒤에도 양사는 국내외에서 기나긴 법적 싸움을 이어갈 수 있다. 수 천억원의 소송비용은 1조원 이상 늘어날 수 있고, 모든 소송이 끝나기까지 3년이 걸릴지, 5년이 걸릴지 누구도 알 수 없다. ITC는 일단 영업비밀 침해와는 별개로 이뤄지고 있는 양사간 특허침해 소송 판결일을 2021년 11월30일로 정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양사 모두 합의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점이다. 판결일까지는 이제 35일(11월5일~12월9일) 남았다. 어찌보면 ITC가 양사는 물론 한국 정부와 산업계에게 다시 한번 심도있게 들여다보라고 시간을 준 것일 수 있다.
더 원만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 지을 순 없는 지 모두가 손을 맞잡아야 할 때다. 더욱이 바이든 후보가 미국 대선 당선이 유력시되며 신재생에너지 인프라에 2조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그의 공약이 실현되면 K-배터리가 지금과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