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취임 5주년째인 1993년 사장단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신경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2류 근성을 뿌리째 뽑아내는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며 "자식과 마누라 빼고 모두 바꿔보자"고 일갈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21세기에는 1명의 천재가 10만~20만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1987년 회장에 취임해 2014년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27년 마하경영의 변곡점마다 터졌다. 그의 마지막 신년사(2014년)는 "다시 한번 바꿔야 한다"였다.
이 회장 스스로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안주하는 삶을 배척한 혁명가였다. 한번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업을 밀고 나가는 집념이나 추진력은 주변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부친인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마저 위험이 크다며 결정을 미룬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면서 1974년 사비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일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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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의 3남으로 태어난 이 회장이 호암의 후계로 낙점받은 데도 이런 기질이 크게 작용했다. 이병철 회장은 1977년 일본 닛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이 작은 규모의 기업이라면 위에서부터 순서를 따져 장남이 맡으면 되겠지만 삼성그룹 정도의 규모가 되면 경영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며 3남 후계구도를 처음 언급했다. 이 회장은 이때부터 꼭 10년 뒤인 1987년 호암이 노환과 폐암 합병증으로 별세하자 그룹을 물려받아 일생을 통해 부친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날 이 회장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이 회장 재임 동안 점차 다른 전문 경영인들이 그룹에서 더 큰 책임을 지게 됐지만 이 회장은 삼성의 '큰 사상가'(big thinker)로 남아 거시전략 방향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프랑스 AFP통신은 "이 회장은 삼성전자를 글로벌 테크 거인으로 변모시켰다"고 소개했다.
이 회장 별세로 삼성그룹은 이재용 부회장 중심의 3세 경영 시대를 공식적으로 열게 됐다. 유가족은 이 회장 뜻을 존중해 가족장을 치르기로 했다. 발인은 오는 28일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부인 홍라희 여사,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장남 이재용 사장 등이 2012년 7월29일 새벽(한국시간) 영국 런던 올림픽파크의 아쿠아틱스 센터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을 참관하기 위해 수영장을 찾아 건너편에 있는 지인과 인사하고 있다. /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사진=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20120728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k
'위기경영' 선구자 이건희…그는 어떻게 매출 200조 신화 만들었나?
(서울=뉴스1) 이동원 기자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1942년 에서 태어난 고인(古人)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만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뉴스1 DB)2020.10.25/뉴스1
1987년 선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그룹을 승계받았을 당시만 하더라도 삼성전자는 냉장고, 세탁기 등 백색가전과 흑백TV가 주력제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해 3억대 이상의 스마트폰을 판매하고 평면 고화질 TV시장에서 8년 연속 판매 1위를 달성하는 등 명실상부 글로벌 '종합전자회사'로 발돋움했다.
그는 선대 숙원사업이었던 반도체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끌었다. 연구인력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로 후발주자에서 시장 선도자로 탈바꿈했다. 특히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장점유율 30%대 이상으로 확고한 1위를 기록 중이다.
이 회장의 이 같은 성공신화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밝힌 '신(新) 경영' 선언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당시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라며 철저한 '자기혁신'을 주문했다. 이는 경영승계 후 5년간 삼성그룹의 장단점과 미래먹거리 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날 이후로 삼성그룹의 체질은 대폭 바뀌었다. 소비재 중심에서 전자로 무게추가 옮겨졌다. 그룹 규모는 날로 커졌고,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도 확대됐다.
1993년 시가총액 2조~3조원 규모였던 삼성전자는 불과 2년 만인 1995년 시총 10조원을 넘어섰고 2004년 4월 13일 처음으로 시가총액 100조원을 돌파했다. 이어 2012년 3월 14일 시가총액 200조원대 시대를 열었다.
신경영 선언 이후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20년 만에 100배 가량 키운 셈이다.
이 회장은 선두에 안주하지 않는 위기의식을 토대로 임직원들에게 끊임없는 혁신을 주문했다. 그의 대표적인 경영론인 '한계돌파', '마하경영' 등은 이 같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회장은 이밖에도 "천재 한 사람이 10만명을 먹여살린다"(2002년), "개척자로서 험난한 여정을 걷자"(2008년),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사라진다"(2010년), "여성이 사장이 되면 본인의 뜻과 역량을 다 펼칠 수 있다"(2011년) 등 인재·위기·여성경영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1987년 12월 이건희 삼성 회장이 취임식에서 당시 입사일이 가장 빨랐던 최관식 삼성중공업 사장으로부터 삼성 사기를 받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연결기준 매출 100조원을 최초로 넘긴 해가 2008년(121조2940억원)이며 이후에도 스마트폰 등 IT기기 판매 호조로 비약적인 성장을 지속해 4년 만인 2012년에는 삼성전자 사상 최초로 매출액 200조원을 돌파했다. 2013년에도 이건희 회장의 격려 능력이 빛을 발하며 삼성전자는 매출 228조6900억원, 영업이익 36조7900억원으로 최대 실적을 이어갔다.
발전 속에서 이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끊임없는 혁신을 주문했다. 2013년 10월 열린 신경영 20주년 만찬회에서도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합니다.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 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힘차게 나아갑시다"고 독려했다.
이 회장의 유고로 그룹은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상 책임지게 됐다. 이 부회장이 선대가 닦아놓은 성공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지, 특히 그룹이 당면한 스마트폰 이후 '미래먹거리' 사업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오동희 선임기자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이건희 회장식 '신경영'은?
이 회장은 1987년 취임한 이후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변모시켰다. 이 회장이 취임 당시 10조원이었던 삼성 매출액이 2018년 387조원으로 약 39배 늘어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같은 기간 이익은 2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259배,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무려 396배 증가했다.
이 회장의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로 유명한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섰다. 2020년 브랜드 가치는 623억 불로 글로벌 5위를 차지했고 스마트폰, TV, 메모리반도체 등 20개 품목에서 월드베스트 상품을 기록하는 등 세계 일류기업으로 도약했다.
이 회장이 1995년 3월 구미사업장에서 '애니콜 화형식'을 통해 삼성 임직원에 경각심을 심어준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품질은 나의 인격이오 자존심!'이란 현수막을 내걸고 임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폰 등 총 15만 대를 불태웠다. 이를 계기로 11.8%에 달했던 삼성전자 휴대폰의 불량률은 2%대까지 떨어졌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11년 7월6일 남아프리카공아국 더반에서 열린 123차 IOC 총회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선정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시 요란한 분위기 속에서 이 회장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사진제공=삼성전자
특히 '반도체 사업이 한국인의 문화적 특성에 부합하다'고 결론 내린 이 회장은 1974년 한국에서 반도체 사업을 일으켰다. 이후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과감한 투자로 '반도체 불모지'였던 한국은 1984년 64메가 D램을 개발하고 1992년 이후 20년간 D램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지속 달성하는 등 2018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44.3%를 기록했다.
이날 이 회장의 타계는 2014년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만이다. 1942년 에서 태어난 고인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이정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