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표준어선형 제도, 안전과 복지의 기준을 바꾸다

머니투데이 이연승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이사장 2020.10.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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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승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이사장. /사진=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이연승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이사장. /사진=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윤도’(輪圖), 중국 한나라부터 사용해오던 전통 나침반이다. 가운데 지남침을 두고 가장자리에 원을 그려 24방위를 가리킨다. 우리나라도 예부터 풍수와 천문, 방위 등을 헤아리는 데에 사용해왔다.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은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알헤시라스호’ 명명식에 참석해 국가무형문화재 김종대 윤도장이 만든 전통 나침반, ‘윤도’를 전달했다. 망망대해 뱃길의 안전한 항해와 해운·조선업의 밝은 미래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발명된 지 수천 년이 지난 전통 나침반인 ‘윤도’가 세계 최대·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대형 상선의 명명식에 등장한 이유는 안전한 항해를 염원하는 전통 의례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도’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게 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담보되지 않은 바닷길 안전, 윤도의 행운에 기대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닐까. 과학혁명의 21세기, 안타깝게도 해양사고는 매년 늘고 있다.



대형 상선에 비해 건조 능력이 열악한 어선으로 화두를 옮기면, 바닷길 안전은 더욱 위태로운 민낯을 드러낸다. 현재 어선은 전체 해양사고의 약 70%를 차지한다. 어선 노후화와 어선원의 고령화로 인한 인적과실이 대표적인 원인이지만, 어선 고유의 낮은 안전성과 열악한 조업환경이 뒤엉켜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어선의 규모를 제한하고 있어 안전사고에 취약한 구조를 띠고 있다. 고령의 어업인이 복지공간이나 조업시설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 노출되다보니 피로도가 증가하고 결국 해양 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이 현재 정부와 공단의 진단이다.

안전성과 효율성, 조업 편리성 등을 갖춘 어선 본연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어업인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기술개발과 제도마련이 급선무인 이유다.


이에 정부와 공단은 지난 2월 어선안전관리체계 구축과 연구를 위한 전문가 기술자문위원회를 개최하고 ‘어선안전고도화 사업’을 본격 시작했다. 정부관계자와 학계, 산업계, 연구단체 등이 모여 어선과 어업인의 안전을 둘러싼 모든 제반 사항을 점검하고 대안 마련에 나섰다.

그리고 6개월 후, 첫 결실을 맺었다. ‘안전복지를 강화한 표준어선형에 관한 기준’(표준어선형 제도)이 제정됐다. 정부는 지난 8월, 수산자원관리와 어업인의 안전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표준어선형 제도를 마련해 행정 예고했다.

표준어선형 제도는 크게 ‘복지공간 허용’과 ‘복원성 검사 확대 적용’을 핵심으로 한다. 어획량에 직접적인 영향이 적은 화장실과 조리실 등 어선원의 복지공간은 허가톤수에서 제외하고 증설을 허용했다. 대신 상부구조물로 한정했다. 또 복지공간 신설로 어선의 규모가 커지는 점을 감안, 복원성 안전 기준을 확대·적용하기로 했다.

복지공간을 상부구조물로 한정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위급상황에서의 탈출이다. 그동안 선원실은 어선의 하부, 즉 기관실(엔진룸)이나 어창 등과 같은 선체 하부에 있었다. 이는 화재나 충돌 등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탈출이 어려워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지기도 했다.

정부와 공단은 표준어선형 제도 도입과 함께 어선안전고도화 사업에서 추진 중인 ‘건조업 등록제’와 ‘검사제도 선진화’, ‘어선건조 진흥단지 조성’ 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어업인과 선박검사원이 함께 어선을 관리하고, 어선 생애주기 전체를 살피는 등 고품질 어선 건조 및 안전관리, 어업인 안전과 복지 증진을 목표로 하고 있다.

표준어선형 제도는 어선안전고도화 항해의 첫 출발이다. 제도를 개선하고 그 위에 기술력을 입히고, 의식 전환을 꾀하더라도 ‘바닷길 안전’은 여전히 지켜내기 어려운 난제다. 어업인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공단의 의지, 제도 개선에 힘쓰는 정부의 노력 등 어선안전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노력이 있어야 실현 가능할 것이다.

우리 공단은 바다를 생업으로 한, 만선의 꿈을 품은 해양가족을 현장 최일선에서 만난다. 그들의 일상이 촘촘한 안전망 속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공단의 모든 노력들이 현장에서 빛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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