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GE는 되고, SK·LG는 안된다?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0.10.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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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가 판다/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 도입]지주회사 전환 기업이 오히려 벤처투자 역차별 받아

지난 6월 24일 열린 2020 더벨 벤처캐피탈 포럼 전경 / 사진=홍봉진기자 honggga@지난 6월 24일 열린 2020 더벨 벤처캐피탈 포럼 전경 / 사진=홍봉진기자 honggga@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

사회주의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국가주석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며 든 비유다.

사회주의 정치 체제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경제정책의 유연성을 강조한 말로 유명하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과는 달리 국내 경제 정책은 1980년대 '재벌해체'라는 투쟁 이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규제의 늪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특히 정부가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적극 유도했던 지주회사 체제에 편입된 SK나 LG 등이 국내에서 벤처기업에 투자하려고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를 도입하려고 해도 '금산분리정책'이라는 오랜 족쇄에 걸려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일반지주회사인 SK와 LG 등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과 함께 신기술과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 Corporate Venture Capital)의 보유가 불가능해 확장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료출처: 국회입법조사처 자료 재인용.자료출처: 국회입법조사처 자료 재인용.
◇구글 GE는 자유롭게 CVC 설립…국내 일반지주사는 안돼=구글이나 GE 등 전세계 주요 기업들은 CVC를 통해 벤처기업에 전략적으로 투자해 신규사업을 넓히거나 기존 사업과 접목해 상승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같은 글로벌기업의 벤처투자를 국내 일부에선 과거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확장'이라며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서는 이들과 견줄만한 우리 기업이 사업범위를 넓히지 않으면 더 큰 외국의 공룡 기업들이 시장을 차지하는 '약육강식의 정글 시대'가 됐다.


미국의 경우 유수의 IT기업들이 벤처캐피탈들의 지원을 받아 성공한 경험을 발판으로 재투자하는 시스템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적인 사레가 구글벤처스, GE벤처스, 인텔캐피탈, 퀄컴벤처스, 시스코인베스트먼트, 씨티벤처스 등이 있다.

이들 CVC 외에도 국내에선 지주회사 체제가 아닌 삼성전자 산하의 삼성벤처투자나 지주회사이긴 하지만, 지주회사에 편입되지 않은 CJ의 타임와이즈 등이 CVC를 운영하고 있다.

◇정부 정책 따랐다가 오히려 역차별=현행 법률에서 기업이 CVC를 도입하는 것에 대한 규제는 원칙적으로는 없지만, 국내 일반지주회사들은 공정거래법에 의해 금융사인 CVC를 원칙적으로 보유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제8조의2(지주회사 등의 행위제한 등)에는 금융지주회사 외의 지주회사(일반지주회사)인 경우 금융업 또는 보험업을 영위하는 국내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SK나 LG 등 일반지주회사는 금융회사의 주식을 갖지 못하게 돼 있고 이를 위반하면 제재를 받는다는 얘기다. 또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대기업)에 속하는 회사가 중소기업 창업투자회사(CVC)를 보유할 경우 후속투자에 제한을 받고 있다.

일반지주회사가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방법은 벤처기업을 자회사(계열회사)로 두고, 자회사 지분의 40%(상장사는 20%)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공정거래법 제8조의2제2항)

이는 과거 산업자본이 취약할 당시 산업자본이 금융 자회사를 소유하고, 그 회사를 통해 고객 자산을 빼돌려 자회사를 지원하거나 계열사를 늘리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금산분리)였다.

재계 관계자는 "1980년~1990년대에는 산업자본이 취약해 금융자본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일부 대주주들의 전횡이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며 "그러나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부터는 이런 문제가 사라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산업자본이 오히려 자본여력이 더 나을 정도로 성장해 '금산분리' 원칙을 표방하며 우려하는 폐해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며 "오히려 산업자본이 적극적으로 벤처기업을 육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는 규제로 인해 지주회사 체제의 대기업들은 CVC를 지주사 체제 밖에 두거나 해외에 만드는 식으로 운영해 벤처기업 육성을 통한 시너지 창출에는 한계가 있다.

지주회사 체제 중에서는 롯데(롯데엑셀러레이터), 코오롱(코오롱인베스트먼트), CJ(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가 지주체제 밖에 CVC를 두고 있으며, LG와 SK 등은 해외법인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자료출처: 국회입법조사처.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의 규제완화쟁점과 개선방안 중.자료출처: 국회입법조사처.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의 규제완화쟁점과 개선방안 중.
◇재무적 이익 바라는 IVC와 전략적 투자인 CVC의 차이=정부는 CVC의 도입보다는 기존 벤처지주회사 제도를 통해 벤처투자 활성화를 도모하려고 했으나,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2001년 도입한 벤처지주회사 제도는 외부펀딩이 불가능하고 모기업 자금만 투자에 쓸 수 있고, 지분 20% 이상을 보유해야 하는 등 기업현실에 맞지 않아 활용사례가 사실상 전무한 상태다.

또 투자 위험이 있는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를 위해서는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한데 단기간의 투자수익이 목적인 IVC는 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한다.

반면 CVC는 비금융 일반기업이 재무적 이익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독립적인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이어서 이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IVC는 투자를 통한 재무적 이익 추구가 목적이지만, CVC는 이러한 재무적 목적 외에도 모기업의 사업 확장, 외부의 자원(기술, 인력) 탐색 및 확보, 신시장 개척 등 전략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최근에는 기존 주력사업의 대안 발굴과 모기업의 자체 R&D 추진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으로 CVC를 활용한 스타트업 육성이 강조되고 있다.

IVC가 투자자를 모집한 후 공동으로 투자하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CVC는 모기업의 성장을 위해 전략적으로 투자하는 성격이 강하므로 공동투자보다는 단독투자를 선호해 이를 위한 제도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재계는 4차 산업혁명 시대 맞아 신규기술·아이디어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긴요하고, 벤처기업의 특성상 성공확률이 매우 낮고 실패에 대한 리스크가 높아 벤처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투자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장기화 등 경제침체로 인해 2018년 1분기 6377억원에서 2019년 1분기 7789억원으로 늘었던 벤처투자는 올해 1분기에는 7463억원으로 4.2% 줄고 있다.

자료출처: 대한상공회의소자료출처: 대한상공회의소
◇정부의 노선 변경…이젠 국회가 나서야 할 때=정부도 지난 7월 일반지주회사의 CVC 보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해 벤처기업 육성 의지를 내비쳤다.

다만 그 허용 요건으로 △일반지주회사가 지분 100% 보유 △투자업무만 허용 △펀드 조성시 외부자금 출자 40%로 제한 △특수관계인 지분 보유 기업 투자 금지 △자기자본의 200%로 차입규모 제한 등을 뒀다. 이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에는 벤처투자활성화를 위해 일반지주회사의 CVC 보유를 허용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지만,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정영석 대한상공회의소 기업정책팀장은 "벤처 투자에 있어서는 외국처럼 별도 규제를 두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다만, 시행초기에 남용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규제 도입하더라도 일반지주회사의 CVC 보유를 허용하는 법안을 조속 입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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