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 꽃집에서 꽃을 든 기자. 꽃이 혹시나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늘 조마조마했다./사진=꽃집 사장님
우아하게 꽃을 들 줄 알았지, 장갑부터 낄 줄은 몰랐다. 장미꽃 생화(生花)엔 코뿔소 뿔처럼 뾰족한 가시들이 그득했다. 쉴 새 없이 찔리기 일쑤라 잘 손질해야 했다. 노란색 가시 제거기를, 장미꽃 줄기에 끼워 위에서 아래로 슬며시 쓸어내렸다. 그러니 가시가 투두둑하고 떨어졌다. 힘을 적당히 주는 게 관건이었다. 너무 세게 했다간 줄기가 다친다기에 진땀이 났다.
아침 7시부터 꽃집은 꽃을 매만지느라 그리 분주했다. 무성한 잎을 정돈하고, 줄기는 매끄럽게 해주고, 부실하거나 다친 꽃은 빼줬다. 싱싱하고 예쁜 꽃만 손님에게, 그러니 어째 버리는 게 더 많았다. 아까워 주저했으나, 꽃집 사장님 김하나씨(35)는 과감했다. "괜찮아요! 자르세요! 버리세요!" 나도 모르게 계속 혼잣말을 하게 됐다. "아이고, 미안하다." 실은 김씨도 같은 말을 옆에서 반복했다. "꽃아, 미안해."
꽃집 안에 있던 나무. 사철나무는 아니지만, 사장님이 설명서만 꽂아둔 것이다. 사계절 푸르렀으면 하는 바람으로 곱게 찍어 보았다./사진=남형도 기자
곧 사라진단 게 알려지자 아쉬워하는 이가 참 많았다. 이대 학생 조은혜씨도 그랬다. 그는 내게 이리 제보해왔다. "학교 앞 단골 꽃집이 있는데 정말 좋은 가게"라며 "단골들도 많은 곳"이라고.
좋은 꽃집이라며, 제보해 온 손님의 마음이 이랬다./사진=남형도 기자 SNS 캡쳐
그 꽃집에 조심스레 하루를 함께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김씨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저나 손님들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 참여해보고 싶다"며 수락했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남기고 싶단 뜻이리라. 그 말에 담긴 마음에, 한 가게가 남긴 의미를 잘 담아내리라 맘 먹었다. 너무 괴롭거나 슬프거나 상실감만 남는 게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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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꽃을 위해 일어나는 시간
꽃만 보면 안 되고, 잎사귀를 봐야 한다고, 하나하나 빼서 보면 망가진 게 보인다며. 특히 "줄기에 상처가 있으면 오래 못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상인들이 싫어해도 빼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좋은 꽃을 손님들에게 줄 수 있다며./사진=남형도 기자
김씨는 14일 새벽 6시에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나자 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꽃을 산단다. 알람을 맞춰 잠에서 깬 시간은 새벽 4시 30분. 까치집이 된 머리를 물로 대충 매만지고 나왔다. 바깥은 컴컴한 어둠이었고, 가을 초입이라 제법 쌀쌀한 기운에 남은 잠을 쫓았다.
역 지하 1층에서 김씨를 만났다. 진한 청바지에 긴 팔 티셔츠, 니트 조끼를 입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그는 소탈하게 웃으며 첫인사를 건넸다. 나보다 더 빨리, 새벽 4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달려왔단다. 별 얘기가 없는데 기사가 될지 걱정이란 그에게, 그저 그걸 쓰고 싶은 거라며 안심시켰다.
익숙한 듯 빨리 걷는 김씨를 따라 꽃시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많이 붐비진 않았다. 보통 밤이나 새벽에 오는데, 새벽은 그나마 인파가 좀 적다고 했다. 사람이 많으면 꽃이 다칠까 걱정이어서, 이 시간엔 그게 덜해 좋다고 했다. 꽃을 예약한 시간이 이르면 밤늦게 오기도 한다. 그럴 땐 꽃을 산 뒤 가게로 가져가 손질한 다음, 다시 집에 가서 자고 나온다. 남들은 몰랐을 부지런한 정성이었다.
꽃을 산 뒤엔 차례로 품에 안았다. 조금 많아졌다 싶으니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실었다. 그리고는 다시 꽃을 사러 갔다. 왜 한꺼번에 안 하냐는 물음에 그는 "꽃을 너무 많이 안고 돌아다니면, 꽃의 얼굴이 상할까 싶어서"라고 했다. 그렇게 한 시간씩, 많을 땐 서너 번씩 오간 뒤에야 꽃을 다 산다고 했다.
꽃을 보면 '위로'가 되어서, 시작한 꽃집
김씨가 만든, 아름다운 꽃바구니./사진=꽃집 SNS 캡쳐
10대 땐 식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단다. 화분 키우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식물학과가 이과인 걸 알고 포기했다. 역사를 좋아해 대학교 땐 사학을, 대학원에선 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엔 여전히 꽃집 사장이 있었어요." 밀려났지만 품어둔 꿈이었단 의미였다.
첫 직장은 박물관이었고, 스트레스가 많았다. 내 몸보다 유물을 소중히 다뤄야 하는 게 힘겨웠다.
그러다 아는 대학원 언니 권유로, 일주일에 두 번씩 꽃을 배웠다. 위로를 많이 받았다. 스트레스도 덜고, 집에 오면 내 손으로 만든 꽃을 또 보고, 그게 큰 힘이 됐다.
취미로 5년을 하고, 꽃집을 내기로 맘먹었다. 그가 꽃을 보며 위로를 받았듯, 누군가에게도 그랬으면 했다. 그러나 남편은 물론, 친정과 시댁 가족들 모두 반대했다. "멀쩡한 직장 놔두고 왜 그러느냐, 장사가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고 뜯어말렸다.
그러나 좋아하는 걸 차마 막지 못했다. 남편이 결국 맘을 바꿔 아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실패하더라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보자. 뒤늦게 했다가 얻는 상처가 더 클 거야. 하고 싶은 걸 해." 사랑하니 어쩌지 못하는 따스한 응원이었다. 김씨는 "일 마치고 집에 와 다리 아프다 하면 아무 말 없이,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준다"며 "영원한 내 편이고, 평생 친구"라며 남편에게 고마워했다.
반대하던 다른 가족들도 나중엔 모두 김씨를 응원했다. 가게가 바쁜 날엔 항상 달려와주는 친정 어머니, 걱정도 많지만 며느리 고생 안 시키려 늘상 배려해주는 시어머니까지. 그는 가족에겐 늘 진심으로 고맙다며, 깊이 표현하고 싶어했다.
'아름다운 인생', 가게 이름을 짓고
오전 7시쯤, '아름다운 인생'이란 뜻을 가진, 이대 꽃 가게에 도착했다./사진=남형도 기자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인생'이란 뜻이란다. 의미가 좋다고 하니, "남편과 며칠 밤을 고민해 지은 이름"이라며 미소 지었다. 꽃 주전자 위에 핀 튤립 세 송이가 그려진 로고도 정겨웠다. 그 또한 오래 고민해서 정한 거란다. 아무렴, 새로 시작하는 맘이 오죽 애틋했을까.
꽃을 가게에 들이며 내부를 둘러봤다. 흰색과 민트색, 청록색 벽이 산뜻했다. 그 역시 김씨와 남편이 일일이 롤러로 칠했다. 텅 빈 가게에서,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함께 칠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손때 묻은 정성스러운 시간이, 이 공간에 다 담긴 거였다.
4년 전 이대 앞에 '꽃길에서'란 첫 가게를 냈고, 2년을 한 뒤 지금 가게로 옮겼단다. 첫 꽃집은 공간이 너무 협소해 손님들이 줄을 자주 서야 했고, 그게 너무 죄송했었다고. 그래서 가게를 조금 더 넓혔고, 덕분에 몇몇은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김씨가 바쁠 땐 밤샘 작업을 할 때도 있어 피곤했었는데, 쉴 수 있게 푹신한 소파도 들여놓았다.
가게 안은 그의 취향을 꼭 닮았다. 전체적으로 동그라미 같은 느낌이랄까. 조명과 화분, 장식해놓은 인형도 다 동글동글해서 어쩐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미니 장미 같은 꽃을 자주 사는 것도, 동그란 걸 좋아해서라니. 애정과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었다.
아름다운 꽃 또한 당연한 게 아니라고
꽃은 아름답게 다 손질돼 있는줄 알았더니, 웬걸. 하나하나 손이 다 가야 하는 거였다./사진=남형도 기자
날 것 그대로의 꽃들을 정성스레 손질하니, 꽃이며 이파리며 가시들이 산더미처럼 나왔다. 그걸 손질하는 동안 몇 번이나 찔렸고, 가위를 쓸 땐 잎에 가려진 손가락을 못 봐 아찔한 순간들도 많았다. "기자님, 손 조심하세요, 손!"이란 말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 그러니 김씨 어머니 역시, 그의 성할 틈 없는 손을 보며 맘 아파하는 날이 많단다.
꽃 손질을 마치고, 줄기 끝을 대각선으로 잘랐다. 고생했으니 물을 조금이나마 더 마시라는 배려다. 그 사이 김씨는 꽃 냉장고를 깨끗이 청소하고, 화병을 시원스레 씻어 가져왔다. 맑은 화병에 꽃을 꽂아 냉장고에 넣으니, 비로소 반짝반짝 빛이 났다. 뭐든 애정이 필요한 것이었으리라.
손님이 있든 없든, 마지막 날이 결정되었든 그렇지 않든, 그의 성실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간을 잊게 하는 부지런한 움직임이었다. 틈틈이 가게를 청소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완성된 꽃다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그 기분 좋은 기운이 가게 안에 가득해 힘이 저절로 났다.
꽃다발 만들다, 손에 쥐 날 뻔…
꽃다발을 만들고 있다. 손에 쥐가 난다. 힘들다./사진=웃으며 바라보는 꽃집 사장님
디자인은 자신이 없어, 사장님이 추천한 주황빛 장미꽃과 소재들을 골랐다. 그리고 엄지와 손바닥 사이에, 꽃을 하나씩 끼워 나갔다. 장미꽃 하나, 소재 하나. 이렇게 꽃다발을 만들어나가는 거였다.
그런데 개수가 늘어나니 잡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줄기 방향이 각각 다른 곳을 향하게 잡아야 하는데, 모양이 자꾸 망가졌다. 김씨는 "꽃 모양이 하트를 그리게 하면 잘 된다"고 했다. 머리는 아는데 꽃은 자꾸 들쑥날쑥, 이상하게 됐다. 꽃과 줄기까지 10개가 넘어가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손에 쥐가 날 것처럼 욱신댔다. 보는 것과 딴판이었다.
포장도 어려웠다. 꽃다발 하나에 들어가는 포장지만 세 개였다. 이걸 이리저리 구기고, 접고, 펼치고 해서 모양을 만들어야 하는데 괴상해졌다. 김씨가 쩔쩔매는 날 보며 웃었다. 웃기려는 게 아니라 열심히 한 건데, 즐거워하니 아무렴 어떠랴. 그리 우여곡절 끝에 꽃다발이 완성됐다. 그는 "처음엔 포기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집념이 대단하다"며 칭찬해줬다.
그렇게나 마음을 썼다
모 대기업에 입사한 기념 축하 꽃다발이라며, 그에 맞는 색감을 두루 쓰는 섬세함이란. 그러니 만족하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사진=꽃집 SNS
그날 예약된 조화를 다듬을 때였다. 꽃다발을 다 만들고 화병에 꽂으면 되는 거였다. 김씨가 갑자기 꽃다발 줄기 끝에 글루 건(공예 등에 쓰이는 접착 기구)을 쏴서, 접착제를 굳혀 동그랗게 만드는 게 아닌가.
"어차피 꽃병에 담길 꽃인데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으니, 김씨는 "사가는 손님이 아이가 있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꽃을 빼서 가지고 놀다가, 철사로 된 줄기 끝에 찔릴 수도 있다면서. 그러면서 줄기 끝을 하나하나 동그랗게 만드는데, 일순간 숙연해졌다. 꽃다발만 만드는 게 아니라, 그게 놓일 공간과 사람까지 상상하는 거였다.
꽃을 미리 예약받아 만들 때도 그랬다. 예컨대, 미술 전시회에 쓴다고 하면 이렇게 묻는단다. 혹시 작품이 어떤 것인지, 포스터를 보여줄 수 있는지, 받는 사람이 입는 옷은 무엇인지. 그 이미지를 떠올리고 상상해서, 그와 어울리는 꽃을 만든다. 또 어머니께 드릴 꽃이라 하면, 평소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보석을 하는지, 취미는 어떤 것인지 묻고 그를 고려해 꽃을 만든다. 그리 만든 색색의 꽃들을, 받는 이가 좋아하고 기뻐할 때 가장 뿌듯하다고.
결혼식 부케는 심지어 직접 결혼식장을 방문해 전달한다. 이모님이 부케를 함부로 놓은 적이 있었는데, 꽃이 상하는 게 마음 아팠다. 그 뒤론 빠짐없이 직접 가서 전했다. 직접 건네주고, 축하해주고, 어떤 방향으로 잡는 게 예쁜지까지 일러준 뒤에야 돌아선단다.
코로나19로, 꽃집은 마지막 날이 정해졌다
이곳의 바깥은 이미 겨울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입학도, 졸업도, 연주회도, 전시회도, 축제도 전부 줄줄이 취소됐다. 꽃가게엔 치명타였다. 3~4월엔 매출이 3분의 1 수준으로 꺾였다. 월세 165만원(부가세 포함)에 부대 비용까지 합치면, 숨만 쉬어도 200만원이 넘게 나가는데 감당이 안 됐다. 정부 지원금으로 두어 번 월세를 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대가 2학기에도 온라인 개학을 하는 걸 보고 '이젠 안 되겠다' 여겼다. 9월 29일까지만 하자고, 속 쓰린 결정을 내렸다.
꽃집 출입문을 하염 없이 바라보며, 그가 보냈을 시간을 짐작했다. 하루 내내 가게를 찾은 손님이 총 3명, 그중 꽃을 산 건 2명밖에 안 됐다. 꽃집 온도는 20도에서 22도로 유지해야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니 더 스산히 느껴졌다. 김씨는 패딩 점퍼를 가져다 놓고 입는다 했다.
화장실에 가는 길에 주위를 둘러보니 텅 빈 거리, 오가는 이가 정말 적었다. 주변 가게 사장과 점원들이 더 많은 듯했다. 기다리는 맘을 김씨와 대화하며 달랬다. 그나마 그날은 둘이어서 나았고, 다른 날은 사장님 홀로 견뎠을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벌떡 일어서게 됐다.
그러니, 손님들은 일없이도 꽃을 사 갔다
손님들이 꽃집에 들러 남기고 간 수많은 선물들./사진=꽃집 SNS
이대 한 학생은 "그냥 지나가다 들렀다"며 불쑥 찾아와,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또 다른 학생은 "일주일에 한 번씩 꽃을 바꾼다"며 왔고, 그렇지 않으면 "꽃집은 여기 밖에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또 사 갔다.
이날 찾아온 두 아이 어머니라는 손님. 서울 동작구로 이사갔는데, 여기 꽃이 예쁘다며 또 사러 왔다. 손에는 시원한 커피 하나를 들고 와, 김씨에게 마시라며 건넸다. 그에게 "이달 말까지만 영업한다"고 하자, "이제 어디서 꽃을 사느냐, 아쉬워서 어떻게 하느냐"며 어쩔 줄 몰랐다. 꽃을 배우고 싶다며, 나중에 꼭 집에 놀러 오라는 말도 했다.
같은 날 꽃집을 찾은 조씨는, 공교롭게 내게 제보했던 이대 학생이었다. 그는 "정말 취재하러 왔느냐"며 무척 반가워했다. 그러더니 사장님에게 추석 성묘 때 쓸 꽃을 주문하고, 둘은 어떻게 만들면 좋을지 긴 대화를 나눴다. 꽃 주문을 마치고도 친근한 이야기가 오갔다. 김씨는 "지난번에 추천해 준 맥주가 너무 맛있었다"고 했고, 조씨는 "졸업 작품으로 만든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며 컴퓨터를 켰다.
꽃 사진을 예쁘게 찍어야 한다며, 시범을 보이는 손님. 어떻게든 널리 알리고 싶은 그 마음이 이리 먹먹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아니, 사장님. 사진을 이렇게 찍다니! 봐봐요. 이렇게 하면 더 예쁘게 나오죠? 그리고 이걸 누르면 뒤쪽 배경이 흐릿해져요, 이렇게 찍어 올리세요."
그러면서 몸소 무릎을 굽히고, 시범을 열심히 보여주는 게 아닌가. 그걸 열심히 배우는 사장님과, 알려주는 손님, 그 둘의 뒷모습은 괜스레 먹먹했다.
그 꽃은, 이런 의미였어요
내가 만든 꽃다발. 아내는 예쁘다며, 모처럼 벽에 세워두고 사진을 찰칵찰칵 찍으며 좋아했다. 꽃의 매력이란 그런 것일까./사진=남형도 기자
"제 졸업도, 부모님 생신도 여기서 했어요. 부케도 여기서 할 거란 말입니다."
"아빠 승진 때, 입사 후 부모님께 드릴 돈 박스도, 결혼 기념일도 다 사장님께 부탁드렸는데,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에요."
"졸업식 꽃은 꼭 여기서 하고 싶었는데, 좀 더 빨리 졸업할 걸 그랬어요."
"여기서 애인에게 줄 꽃 샀었는데요ㅠ"
"정말 고맙습니다. 거의 5년간 예쁜 꽃들로 행복한 일들을 기록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가 만든 꽃들은 결혼의 시작이었고, 사랑의 고백이었으며, 태어나서 기쁘단 속 깊은 표현이었고, 고인이 된 누군가를 못 잊고 기억한단 의미였을 터였다.
나 역시 그날 밤, 아내에게 직접 만든 꽃다발을 건넸다. 어쩐 일로 꽃이냐며, 너무 예쁘다며, 뜻밖의 선물에 배시시 웃었다. 그걸로 충분히 좋았다. 아내는 꽃다발을 하얀 벽에 세우더니, 사진을 이리저리 찍었다. 그러더니 귀한 자리를 택해 세워뒀다. 집안은 환했고, 지날 때마다 행복해졌다. 꽃다발 하나가 그런 의미였다.
여전히 이 세상엔, 당신이 필요하다고
성묘 때 쓸 꽃다발의 크기를 손님이 정확히 모른다며, "손바닥 정도 된다"고 하니, 그마저도 정확히 재는 꽃집 사장님./사진=남형도 기자
힘들어하는 많은 사장님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가게 또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또 의미를 남겨 왔을 거라고. 지금은 상황이 나빠 주춤하고 있지만, 그게 끝은 아닐 거라고. 단지 '폐업'이란 단어 하나로 모든 게 다 사라지는, 그런 단순한 게 아니라고. 어떻게든 진심으로 그런 이야길 하고 싶었다.
쑥스럽다며 밝히지 말아달라던 한 맛집 사장님이 그랬다. 장사만 25년을 했는데, 그동안 세 번 폐업했단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겪은 나날들이 고스란히 생각나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가게 안 공기와 그 안에 있었던 초라한 자신이 생각나 떠올리기조차 싫었다고. 그러나 그 시간에서 배운 게 분명히 있고, 하나씩 기억하고 나아지다 보니 좋은 날도 오더라고. 영원히 계속되는 힘듦은 없다고 말이다.
꽃집 사장님도 그랬다. 곧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이번엔 "로드샵이 아니라, 작업실 하나를 마련할 계획"이라 했다. 위험 부담을 줄이면서도, 효율적인 장사를 하겠다는 취지였다. 4년간 경험치가 쌓였고, 여전히 무척 예쁜 꽃을 만들고 있고, 많은 이들이 좋아한다. 그걸 다른 말로 '희망'이라 부르는 게 아닐지.
당신은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니까, 돌아오길 바라는 이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들에겐 그냥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소중한 시간이고 추억이었으므로. 그리고 그런 떡볶이는, 그런 드립 커피는, 그런 꽃다발은, 그런 기분 좋은 서비스는, 그런 운동은, 그런 섬세한 기술은, 세상에서 오직 당신만 가능한 것이니까.
그리고 꽃집 단골 손님 조씨는 이렇게 말했다. 맘이 듬뿍 담긴 말이었다.
"저는 '이별은 가볍게'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내일 다시 볼 것처럼 말하는 안녕이, 정말 우리를 금방 또 만나게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시간이 흘러 잘 마른 나뭇잎들, 고단함은 날아가고 언젠가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사진=남형도 기자
짐을 하나씩 정리한다던 김씨가, 별안간 책을 잔뜩 꺼내왔다. 책장 사이사이엔 잘 말린 나뭇잎들이 들어있었다.
실은 꽃을 손질한 뒤 버려질 잎들인데, 언제고 쓰겠지 싶어 책에 끼워뒀단다. 그리고 한 두어 달이 지난 지금, 다시 꺼내본 것이었다.
수분이 날아간 초록·주황빛 잎과 갈색빛 줄기들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김씨는 손님에게 선물할 화병을 정성껏 포장한 뒤, 이를 앞면에 붙였다. 그것 하나 덕분에 감성과 정성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니 유난히 긴 이 시간도 언젠가 귀히 쓰일 거라고, 그땐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알게 될 거라고.
저녁 8시부터 유독 어두워 맘 아픈 이대 거리를 지나며, 몇 번씩이고 그리 힘주어 되뇌었다.